▲ 운봉읍 전경

지리산 동편 기슭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雲峰)은 해발 460m내외의 고원지대로 늘 구름이 머무는 곳이다. 고을 지명이 운봉이 된 것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이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운봉군과 남원군이 강제적으로 합쳐 남원군(현 남원시)이 됐다. 


이곳은 예로부터 높은 산속이지만 사람이 살만한 풍요의 땅으로 손꼽혀왔다. 우리나라 십승지(十勝地) 중의 한 곳이 된 운봉. 비옥한 넓은 땅에 연중 메마르지 않은 지리산의 물이 내린다. 남원 정령치에서 발원되는 물은 주천면 고기 삼거리에서 갈려 낙동강 지류인 남강과 섬진강으로 흐른다. 운봉 사람들은 그 물을 받아 농사를 지었고 지리산에 올라 산나물들을 얻어냈다.“운봉에서 배고파서 죽었다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가능한 조건이다. 운봉이 이처럼 사람 살기 좋은 고장이 된 것은 인간을 보듬는 지리산의 생태환경이 그 바탕이다.

신작로가 나기 이전의 대중교통의 일상화가 불가능하던 시절의 운봉은, 자급자족이 가능한 서양의 성(城)같은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근대식 최초의 도로인 신작로가 1923년 남원시에서 운봉읍으로 뚫리기 시작해 1931년에야 개통됐다. 그 전에는 남원과 운봉 사이에는 아흔아홉 고개를 넘어야 갈수 있었을 만큼 험했다. 그 고갯길 여원치(여원재)는 남원~ 운봉 ~함양의 길목이다. 1894년 11월 민씨수구정권의 수탈에 못살겠다며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군 1만 명이 살기 위해 남원성을 점령하고 운봉성을 점령하러가기 위해 가다가 여원치에서 관군에게 섬멸된 가슴 아픈 사연이 서려있다.

남원의 운봉읍은 십승지 이름 그대로다. 땅 힘이 좋아 곡식이 많이 나서 자족이 가능한 사람살기 좋은 곳이다. 게다가 소리(음악)으로 힐링이 되어 장수하는 고을이다. 예로부터 평균 수명이 다른 고을보다 10여년 길다고 한다.

우리 국민들은 남원하면 무엇을 가장 먼저 생각해 낼까? 어느 조사에 의하면, 상품적 인지도가 가장 큰 것은 ‘추어탕’이고, 공간적 인지도가 가장 먼저인 것은 ‘광한루’로 조사됐다고 한다. 정말 남원하면 떠오르는 것은 춘향과 이도령 이야기다. 춘향전은 1892년 프랑스어로 번안됐다. 그 이후 독일어판 체코판이 나왔고 러시아와 미국에서 공연되는 최초의 한류 소재였다.

남원추어탕, 판소리도 빼놓을 수 없는 남원의 대표문화다. 판소리는 소리꾼(명창)이 노래를 부르고, 고수가 북치며, 청중이 추임새를 하는 놀이판. 피렌체의 메디치가문이 숱한 예술과 문화를 꽃피웠듯이 동편제 판소리 태동 계기는 ‘운봉 박부자’의 힘이 컸다. 1780년경부터 시작되어 일제강점기 시절 박부자의 판소리에 대한 흥미로 판소리꾼들이 기대어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 박부자는 박희옥이라는 만석꾼. 1941년 태평양전쟁 당시 부호들은 보국단 발기인으로 비행기 값도 헌납하는 등 친일을 하지 않으면 부를 유지할 수 없었다.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는 명창 송흥록의 생가터가 있다. 이곳에서 송흥록에 의해 동편제가 창시되었으니 운봉은 판소리의 성지이다. 동편제 판소리는 종가의 내림으로 이어져 일제강점기 전설적인 여류명창 이화중선을 탄생 시켰고 박초월 명창으로 이어지는 소리의 역사도 이곳 운봉에 씨앗을 두고 있다. 운봉은 소리꾼의 천국이었다. 판소리 문화는 가장 한국적인 문화로 귀중한 세계 무형 문화의 자원이다. 소리꾼의 활동 이후 조선 말부터는 전국에서 남원이라는 지명 브랜드가 한양, 제주에 이어 3위로 부상 했다.

운봉송흥록 생가

남원 소리꾼들의 단체인 ‘협률사’는 전설적이다. 전 세계 100여 집단 중에 가장 장수하는 집단이다. 비결은 청국장을 늘 먹어서란다. 보통 청국장이 아니다. 청국장 발효의 핵심은 벼짚이었다. 착한 사람이 농사짓게 해서 청국장용 볏짚을 만들었다는 이슬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남원은 가무를 즐기는 고구려 유목민족의 특성이 골수에 살아 있다. 남원은 통일신라시절 9주5소경 중의 하나. 중원(국원)에는 대가야, 남원에는 고구려 귀족들이 정책적으로 이주했다.

석장승 문화를 비롯한, 고랭지 농업 문화뿐 아니라 음식, 대장간, 판소리 문화 같은 것들이 운봉이 가지는 우월한 문화였다. ‘예술문화의 수도’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손색이 없다. 다른 지역의 산물이나 문화가 쉽고 자유롭게 유입되지 못하는 산중 지역이라는 여건이 자급자족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운봉은 강원도 철원과 함께 여름철 김치 문화가 가장 발달했던 곳이다. 아울러 지리산 똥돼지로 불리는 흑 돼지는 지금도 그 맛이 유명하고, 지리산 한봉은 진상품이 됐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의 한약재는 인월 장터를 통한 전국 명산지가 됐다. 또한 지리산 실상 한지는 천년동안 버리지 않고 사용됐을 정도의 명품이었다 하니 한국에서 이만한 韓문화의 클러스터는 어디에도 없을 것 같다.

타 지역에서 무기를 만들어 수송을 해올 수 없는 지리적 여건으로, 이 지역에서 자체 생산 활용해야 했던 대장간 문화는, 운봉이 갖는 독특한 문화의 하나였다. 이 지역의 대장간 기능이 평화 시대가 도래되면서 유기를 생산하는 기능으로 바꿨다. 징, 괭가리는 타 지역에서는 흉내 낼 수 없는 최고의 품질을 가졌다. 이러한 유기 생산 기능은 일제강점기 이후 함양 안의를 거쳐, 거창 지역으로 옮겨갔다.

이처럼 사람 살기 좋은 땅 운봉은, 외침이 많은 전략적 요충지다. 최영 이성계는 고려말 백성들의 원수 왜구들의 침입을 격퇴하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1380년 8월 왜구는 오백여척이 넘는 함선으로 진포(鎭浦)로 침입, 충청ㆍ전라ㆍ경상 3도 연안에 상륙했다. 왜구의 진포 함선은 최무선의 화약 맛을 보고 혼비백산한 채 도망치다 9월 지리산 운봉의 황산으로 몰려들어왔다.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삼도순찰사(三道巡察使)에 임명해야했다.

당시 운봉전투가 조정에서 얼마나 다급한 사변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이장군이 개선하자 판삼사 최영이 백관을 거느리고 천수사(개성 근교의 사찰로 추정) 문전에서 맞이하며 “공이여 공이여! 삼한이 다시 창조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전투에 있었다. 공이 아니었다면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되었겠는가?” 고 말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적을 소탕한 참장수여! 썩은 나무 부러뜨리듯 삼한의 기쁜 소식 공에게 있네 ...” 하며 시를 지어 축하하였고, 윤소종 역시 “후세를 위하여 공이 태평을 열어 주었소”하며 축시를 지었다. 이 싸움이 황산대첩(운봉정산전-雲峰鼎山戰)이다. 최무선의 진포대첩(1380)과 정지의 남해대첩(1383), 최영의 홍산대첩(1383) 등과 고려말 4대승첩이라 한다.

남원 추어탕의 발원이 되었던 운봉 풀시래기 추어탕은 황산전투와 관련이 있다. 황산전투를 벌이며 논두렁에서 미꾸라지와 피라미 잡아서 풀시래기 탕을 해먹으며 군량미 부족을 보충했다. 군사들이 미꾸라지를 잡아 풀대죽을 끓인 추어탕의 보양식을 먹고 힘을 냈다. 훗날 조선의 남원 소리꾼들은 추어탕의 보양식 덕분에 오랜 시간 소리를 할 수 있다는 재담에, 추어탕은 남원의 명물이 되었다. 그 장터의 소리판에서 춘향가를 듣고 사람들은 남원의 광한루와 춘향이를 사랑한 것.

운봉이 왜군들이 선호하는 침략지가 된 것은 군량미 확보의 최적지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금과 같이 영농기술과 자재가 발달하지 못한 시절의 농사라는 것은, 하늘의 뜻이 그 생산량을 결정지었다. 농작물이 열매를 알차게 맺으려면 봄에 늦은 서리가 없어야 하고, 가을에 이른 서리가 내리지 않아야 한다.

남원시는 요즈음 흥부전에 나오는 ‘흥부마을’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실제로 흥부전에도 함양과 운봉 사이 흥부가 산다고 되어있다. 김용근소장은 “흥부가 박 세통을 타 부자가 된 것은 조선시대 큰 장이었던 인월장에 유명한 곶감, 닥, 옻으로 각 1천냥, 도합 삼천냥으로 삼천석지기 부자가됐을것“이라고 추정했다. 지리산 운봉 함양에서 수백 년 동안 잠자던 이야기가, 예술문화의 수도 남원에서 부활하고 있다.



*남원시청 주사로 근무하는 김용근은 남원시의 대표적인 향토사가로 국사편찬위원회 지역사료조사위원, 국가기록원 민간기록조사위원이다. 이 기사 일부는 김용근 저 <춘향고을 이야기/ 남원스타일로 말하다. 2016,1 간>에서 인용했다.



김정모 기자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으로 대통령실, 국회, 정당, 경제계, 중앙부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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