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섬마을 전경.
강변의 넓은 백사장,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외나무다리. 50여 채의 전통가옥, 그리고 울창한 숲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영주의 대표적 관광지 무섬마을을 찾았다.

마치 물위에 떠있는 섬처럼 보여 무섬마을이라 불리며. 예천 회룡포, 안동 하회마을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물돌이 마을이다.

무섬은‘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마을을 휘감고 도는 강은 내천이며 낙동강 상류 물줄기다. 강변에는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깊은 곳이라야 허벅지에 찰 정도로 수심은 얕다. 마을은 예천 회룡포처럼 똬리를 튼 형상을 하고 있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마을에는 수백 년의 역사와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도 하다.

무섬마을이 생긴 것은 1666년이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만죽재’(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3호)표지판에 잘 새겨져 있다. 반남 박씨들이 난을 피해 안동에서 영주로 옮겨왔고, 반남 박씨 16세손 박수가 무섬에 만죽재를 짓고 터를 잡았다. 이후 예안 김씨가 박씨문중과 혼인하면서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그래서 무섬은 지금까지도 이 두 가문의 집성촌이다. 따져보면 모두 친척인 마을 사람이다.

수도교를 건너 마을로 들어서면 고즈넉한 옛집 50여 채를 만난다. 그중 도 민속자료·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집만 9채다. 고종 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김낙풍 고가‘해우당’(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2호), 실학자 박규수의 글씨가 남아 있는 박재연 고택, 지붕마루에 구멍을 낸 경북 특유의 까치구멍집 등이다.

국내에 전통가옥은 많지만 여기처럼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주민들이 사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이는 절묘한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태백산과 소백산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은 두개의 천(川)이 휘감아 돌아 외부로부터 고립되어왔다.

그러나 풍수지리학적으로는 이 마을 지형은 길지다. 매실나무 가지에 꽃이 핀다는‘매화낙지형’혹은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다는 뜻의‘연화부수’형을 가지고 있다. 또한 모든 집들은 남향이 아니라 남서향이며 이유는 강과 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기운을 그대로 이어받기 위함이라한다. 조선시대의 난과 한국전쟁, 천재지변 등을 거치면서도 그 원형을 잃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마을사람들은 믿고 있다.

무섬다리.
뭍과 마을을 잇는 다리는 1980년대 초반 개통된 수도교가 유일하다. 수도교가 생기기전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이어 다리를 놓고, 쟁기며 지게를 지고 다리를 건너 뭍의 밭으로 일하러 갔다. 장마가 지면 다리는 불어난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고,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다리를 다시 놓았다.

300년 넘게 마을과 뭍을 이어준 외나무다리는 수도교가 세워진 이후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이를 아쉽게 생각한 마을사람들은 무섬마을보존회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직접 나무를 베고 다듬어 폭 30㎝, 길이 150m로 외나무다리를 복원했다.

무섬마을의 가장 유명한 명소는 뭐니뭐니해도 외나무다리 인셈이다. 또한 해마다‘외나무다리축제’도 연다. 축제에서는 옛날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을 재현 하여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도 제공 한다.

세월이 숨을 멈춘 듯한 한옥마을, 태백산·소백산 줄기를 끼고 모래톱 사이로 휘감아 도는 강물, 운치 있는 외나무다리 무섬엔 아직도‘옛것’의 아름다움이 남아있다.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 고샅길을 따라 호박넝쿨이 출렁이고, 마당에 고추와 호박을 말리는 모습도 정겹다.

무섬마을을 조망하기 좋은 곳은 외나무다리 건너 마을 앞산. 산 정상에 오르면 내성천을 가로질러 고즈넉이 자리 잡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질녘 주홍빛 노을이 마을을 감싸는 모습도 일품이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별리’를 지어 강마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바도 있다.

고향이 그립고 옛 추억에 목마른 사람이라면 한번 쯤 들러봄직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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