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수명' 자연 만끽하며 도시민 마음 치유하는 생명 근원지

청도의 농촌 들판
경상북도 청도군(淸道)은 ‘아름다운 생명고을’을 자처하고 있다. 이승율 청도군수가 취임하자마자 군의 인문 자연 환경의 정체성으로 내걸고 있다. 청도는 청도천과 동창천을 끼고 있는 경상북도 최남단이자 대구의 남쪽 지역으로 대구 울산에서 귀촌 별장지로 인기다.

산자수명한 청도는 경상도 7개 시군과 인접한 영남알프스의 발원지이다. 장방형의 청도분지에는 태고로부터 삶의 터전을 만들어준 두 개의 젖줄이 있다. 동창천과 청도천이다. 두 하천은 밀양시를 거쳐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밀양강의 상류다. 동창천(東倉川)은 청도군의 운문, 금천, 매전을 거쳐 청도읍 내호리에서 밀양강으로 흐른다.



△화양읍 토평리 백곡마을

청도군내에는 여러 곳에 살기 좋은 마을이 있다. 우선 청도군 화양읍 토평 1리인 백곡(栢谷)은 어머니 품처럼 아늑한 곳이다. 공무원으로 은퇴한 김종길씨는 “이 마을이 아늑하고 농사가 잘돼서 예로부터 살기 좋은곳으로 알려졌다“고 자부심을 나타냈다.

옛 삼한시대 이서국의 도읍지로 추정된다. 그리 높지 않은 산등성이들이 견고하게 삼면을 에워싸고, 낮은 곳은 인위적으로 흙을 쌓아 천연의 산성 아닌 토성을 쌓았다. 남쪽인 앞은 청도천이 흘러 자연을 잘 활용한 성터다. 흥망에 대한 정설이 없으나 이서국이 역사상 존재한 것은 사실이다. 이 마을 주위산에 잣나무가 많아 “잣실”이라고 불렀는데 이를 백곡으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김해김씨의 집성촌이다. 백곡을 중심으로 한 이서국은 신라의 수도 금성을 공격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이었으나 297년 화양읍 이서산성에서 신라군에 패배해 이서군(伊西郡)이 되었다. 소왕국은 망했지만 청도는 신라 화랑정신의 발상지로 거듭났다. 신라는 가야를 병합하고 삼국의 정족(鼎足)을 이룬 고대 국가로 발전하며 운문산 일대에도 화랑들의 수련장을 만들어 삼국통일을 이루는 발판으로 삼았다.



△화양읍 고평리 소라리

화양읍 소라리는 주구산(走拘山)의 목 부분과 어깨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다. 청도천변을 따라 길게 비옥한 들이 있다. 보(洑)가 좋아 수리가 잘 되어 있고, 은왕봉이 바라보이는 전망이 일품이다. 특히 백설이 덮혀 있는 은왕봉의 설경은 경승이라 할만하다.

폐성(吠城)에 있던 산성(山城)리가 없어지면서 이 마을로 이사 온 사람을 중심으로 소라리를 이루었다 한다. 발리산(拔鯉山)을 돌아 흐르는 청도천이 좁디 좁은 들판을 침수시켜 들판이 비옥하다. 폐성은 이서국의 최후 보루로 신라에 항전을 했으나 끝내 정벌 당하였다. 이서국 왕이 패주하여 성덕소(成德沼-淸道川)에 투신 자살함으로써 이서국의 최후를 장식했다고 전하해온다.

고평리는 성현(省峴)의 송정(松亭)산 주릉이 남쪽으로 달려 호복산(虎伏山)을 이루고 여기서 분기한 작은봉우리들이 제각기 갈라져 나가고 주봉은 다시 주구산이 되어 청도천변에서 멈추어 서 있다. 이 주봉을 등지고 동에는 발리산(拔鯉山), 서에는 동산이 마주보는 가운데 산속에 아늑하게 안겨서 자리잡은 마을이다. 마을에서 바라보면 남산이 수호신처럼 우뚝하다. 청도천을 따라 펼쳐진 고평(古坪)들은 예나 지금이나 전천후 농장이요 천전옥답(川前玉沓)이다. 고평이란 고궁(古宮)들의 줄인 말이라 한다. 구전에 의하면 이서국 별궁(別宮)이 있었다는 전설이다. 옛날 집, 곧 오래된 집이 있었던 들이라고 한자로 고궁평(古宮坪)이라 불렀으리라 짐작해 본다.



△이서면 대전리

이서면에는 충청도 제1도시인 대전시와 같은 지명을 쓴 마을이 있다. 아래쪽인 남쪽이고 지대 또한 낮으며 청도천변까지 평지가 이어져 농경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고 있다. 이 마을도 삼면(동, 서, 북)이 산으로 가리어 있으며 마을 앞쪽에는 청도천이 흐르고 있다. 이 동리는 군내 굴지의 집성촌이다. 1969년 3선 개헌을 반대한 공화당 4인방 중 한 사람인 예춘호 전 공화당 사무총장을 낳은 의흥예씨들이다. 연산조 시대인 1500년초에 예씨의 입향조인 의흥인 예극양 공이 예문(芮門)을 열었다. 대전(大田-한밭)이란 명칭은 예공이 입촌하여 부근일대를 개척하여 농토를 넓혀 나가자 넓은 밭이 많아서 한밭이라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대전이라는 것이다.

청도 운문사 솔숲길


△금천 운문면 방지리

청도 방지리는 운문면과 금천면 2개면에 걸쳐있다. 운문면 대천리의 한내재 봉(峰)이 이어져 내려와 마을 뒤편을 병풍처럼 서 있고 다시 이어져서는 동곡현(東谷峴)에서 분기된 지봉은 마을 서편을 감고 돌면서 동창천변에서 멈추어 섰다. 동은 대천리로 이어지고 있으며, 내(川) 너머로 호산(虎山)이 버티어 서 있다. 마을 앞은 기름진 천변의 충적토로된 들로 마을을 기름지게 하고 멀리 억산(億山)이 안대(案臺)가 되어 방지(芳旨)라는 마을 이름 그대로를 엿보이게 한다.

방지2리에는 1500년대 중엽에 경주인 이종현 공이 후손의 번창할 곳을 찾아 울산에서 경주로, 언양으로, 택리를 위해 찾아다니다 정한 곳이 이 마을이라 한다. 방지(芳旨)의 동명은 동창천변의 자갈과 모래가 하도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멀리로는 임당(林塘)리 뒷산에 많은 등성이와 봉우리가 있으며 더 멀리로는 억산(億山)의 봉우리들이 이어져 나가는 원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로 풍경이 절경이다. 풍부한 동창천을 보(洑)로 인수하여 이용하는 문전옥답이라 할 수 있다.

운문면·금천면 일대의 고헌산, 백운산, 장륙산은 600∼1,000m 내외의 산지를 이룬다. 동창천 양안과 개울이 만나는 곳에는 퇴적된 충적층이 넓은 범람원을 발달하여 산간 옥토를 만든다. 금천면 앞 동창천변의 금천 체육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다.

청도의 산천은 대구시에 생명수를 공급한다. 동창천에 물을 대주는 상류 운문면 순지리에 건설된 운문댐은 대구의 식수원. 운문댐 아래 하류보 유원지는 여름 피서객들의 물놀이 장소로 인기다.

운문면 신원리에 있는 고찰 운문사(雲門寺)는 국민 관광지다. 운문사로 들어가는 길을 걸어가노라면 도시에서 세파에 찌든 마음이 저절로 씻긴다. 신라시대 560년에 창건해 대작갑사(大鵲岬寺)라 했다. 608년 원광 국사(國師)가 손을 본 이후 수차례 중건 하고 943년 운문사라 불린다. 현재는 비구니 전문 강원이다.

600년 원광법사가 이곳 운문면의 가슬갑사라는 절에 있을 때 찾아온 귀산과 추항에게 화랑으로 갖추어야할 수신계인 세속오계를 내림으로써 화랑의 실천이념이 됐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삼국통일의 정신적인 원동력이었다.

청도 운문면 동창천 상류 숲길


△매전면 온막리

매전면 온막리는 용각산에서 분기된 연봉들이 산동 산서로 분계령을 이루면서 남주(南走)하다 중산봉을 거쳐 600고지의 용당산이 되고 다시 크고 작은 여러 봉우리들을 사방으로 거느리면서 자미구릉을 형성했다. 마을을 포근하게 품고 있다. 동창천의 덕(德)으로 온막들은 면내 제일의 곡창이다. 자미산(紫嵋山)릉의 남향 상부 지점에 신라 고찰 터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마을이 오래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 때 매전면 사무소가 있었다.

풍족한 시대를 맞고 있는 한국인은 누구나 자연의 품안에서 살거나 휴식하고 싶은 이상을 꿈꾼다. 이 군수는 도시민이 찾아오거나 살고 싶은 땅을 찾는 유행을 파고든다. 물이 맑고 산이 푸르며 인심이 순후한 삼청(三淸)의 청도가 그 자원이다.

대략 1만년 전부터 시작된 농경사회에서 사람 사는 것으로 최적지로 손색이 없었다. 삼한시대 유적인 고인돌이 널리 있어 옛 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었음을 말해준다. 산업화사회에 이농물결로 쇠락했지만, 이제 자연에서 먹고살 것을 찾는 귀촌인이나 도시민의 마음을 치유(힐링)하는 아름다운 생명고을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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