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만조선

지난번 제기한 사항 가운데, 중요한 부분 한두 가지를 검토하기로 한다.

첫째, 위만조선을 우리 역사의 주류로 다룰 필요가 있는가에 관한 관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우리의 역사는 고조선과 기자조선 뒤에 위만조선이 비중 있게 다루어진 뒤, 한사군이 등장한다. 여기서 기자조선이 과연 실재하였는지 실재하였다면 그 성격은 어떠했으며 위치는 어디였는지, 그리고 당시 고조선이 병립하였는지 상세하게 연구?기술되어야 한다. 그런데 상당히 모호하게 정리되고(최근의 경향은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으로 다룬다), 위만조선이 우리나라 정통왕조의 자격으로 기술된다.(위만이 고조선으로 들어올 때에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으며, 왕이 된 뒤에도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고, 그의 정권에는 토착민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많았으므로, 위만의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

위만조선은 중국 망명객이 자신을 보호해준 조선의 임금을 배신하고 다시 그 신하들에게 배신당한 배은망덕의 역사의 중심인물이다. 더구나 위만은 중국인이므로 그 세력이 주체가 된 왕조는 당연히 우리의 역사라기 어렵다. 일연선사는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단군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고구려는 BC 57년에 건국되었다. 따라서 위만조선이 멸망한 BC 108년(또는 107년)에서 고구려가 일어난 BC 57년까지 존립한 단군은 과연 어떤 존재였는지 연구하여야 하지 않을까? 일연은 이 시기를 메울 사료를 구할 수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위만조선을 기술하였다고 하겠지만, 지금은 역사학과 고고학?문헌정보학?천문학과 지리학 등이 고도로 발달하였으므로 고조선의 시작과 끝을 보다 명확하게 밝힐 수 있다고 본다. 중국은 저 애매모호한 하(夏)나라, 상(商)나라, 주(周)나라의 시작과 끝을 하상주 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이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로 확실하게 정리하여 대내외에 발표하였다. 우리는 ‘고조선 프로젝트’라도 추진하여야 하지 않을까?

둘째, 한나라와 고조선의 경계가 패수(浿水)라 하였는데, 패수의 위치가 어디냐는 것은 고조선의 영토를 확정하는 일로서 매우 중요하다. 먼저 한나라가 요동의 옛 요새[요동고새]를 수리한 후, 패수를 경계로 고조선과 대치하였다는 기록은 패수가 요동 부근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패수의 위치에 관하여는 대동강설(수경 주)?청천강설?압록강설?요하설?혼하설(渾河說)?대릉하설?난하설 등 여러 학설이 나름대로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수경(水經)』과 『설문해자』는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고 적었다. 그러므로 동쪽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대동강과 압록강 등은 무언가 맞지 않는다. 『수경』과 그 주석인 『수경 주』의 기록이 서로 다르지만, 『수경 주』는 고구려인에게 그렇게 들었다는 기록이므로, 아무래도 주석의 본문이며 시대도 앞선 『수경』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나라 수군이 조선을 침략할 때, 제나라에서 출발하여 발해를 건너갔다고 기록되어있는데. 그러면 요동반도 서쪽지방이 나온다. 대동강유역을 공격하려면 황해를 건너야 한다. 따라서 패수는 요하서쪽이 되고 우거의 조선과 한나라가 전쟁을 벌인 왕검성은 요하 부근일 것으로 사료되는데, 인하대 국제관계연구소의 군사학적 연구에서 이 설을 지지한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