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산 정기 받아 고려 삼태사·장군 배출한 인재의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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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좌산(鳳座山·626m).
◇태사 3명을 배출한 선비의 고장, 그리고 문화유산

고려 시대 삼사 중 하나로 정일품 벼슬인 태사를 3명이나 배출한 흔치 않은 마을이 있다.

오랜 역사 속에도 선비정신과 정통성을 계승하는 포항시 북구 기계면이다.

옛날부터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것으로 유명한 지역이지만 그 중 윤태사, 유태사, 신태사로 불리는 기계 삼태사가 으뜸으로 이와 관련한 문화재가 많다.

△윤태사

윤태사로 잘 알려진 윤신달은 파평 윤씨의 시조로 고려의 태사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신숭겸, 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고 새로운 국왕으로 왕건을 추대하는 등 고려 건국 공로로 2등 공신에 책훈, 삼중대광태사의 관직을 받았다.

운주산 자락에 자리 잡은 윤태사의 묘는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후손들이 매년 음력 10월 1일이면 추향제를 올리고 있다.

이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조선 영조 때인 1752년 창건된 재실 건물인 봉강재는 28대손인 윤광소가 안동부사로 재임 시 헌금 50량과 목재 15칸분을 헌납해 창건한 후 1762년과 1763년 위토를 늘리고 재사를 중수했다.

경북도 문화재자료 재201호로 지정됐으며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구조재의 짜임새가 세심하게 이뤄진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또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부서진 봉강서원 자리에 세워진 유허비 역시 파평 윤씨의 역사를 증언하는 대표적 문화재로 꼽힌다.

▲ 유태사 전경
△유태사


유태사로 유명한 유삼재도 기계유씨의 시조로 신라 시대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 벼슬을 지냈다.

신라가 쇠하고 그의 후손인 유의신이 고려에 불복하자 기계 호장으로 삼으면서 후손들이 기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부운재는 선조의 덕을 추모하고 후손의 번창함을 기원하는 기계 유씨의 성역으로 숙종 15년(1689) 유하겸 경주부윤이 지역 어르신들의 증언을 토대로 기계면 미현리 비학산 남쪽에 자리 잡은 시조묘를 찾아 표석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후손들이 크고 작은 증축을 이어왔다.

또 덕을 쌓고 효를 실행하는 계기로 만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탁기가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면서 유태사의 공적을 흠모하는 뜻을 담아 세운 신도비도 있다.

기계 유씨의 대표적 인물로 사육신의 유응부, 영조 때 노론의 원로로 영의정을 지낸 유처기, 개화의 선구자 유길준 등이다.

▲ 신태사 전경
△신태사

마지막으로 신태사 신몽삼은 영월 신씨로 고려 명종 19년(1189) 급제해 고려태사 보문각 대제학, 검교대사, 영원부원군을 지냈다.

지묘가 있는 화봉리에는 제를 지내기 위한 화봉제사와 숙연사가 있다.

이외에도 경주이씨 제실, 도원정사, 삼원정, 기천고택 등 수많은 문화재들이 여러 사연을 품고 자리한 고장이다.

뛰어난 자연 절경이 있고 나라를 위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기계면은 각 마을 마다 이들을 기리는 문화재들이 세월의 흔적을 지닌 채 자손들을 보살피고 있다.

조상들의 강인한 정신을 이어받아 새로운 인재들을 끊임 없이 배출하는 곳, 조상들과 교감할 수 있는 이곳이야 말로 인재의 곳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운주봉
◇별들의 고향 인비리

사실 기계면은 삼태사로 유명한 선비의 고장이기도 하지만 장군도 심심찮게 배출한 인재의 산실이다.

삼태사 중 한 분인 윤태사 역시 장군으로도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마을 서쪽에 자리한 운주산(806m)의 정기를 이어 받아 인재가 솟아난다는 인비리의 경우 한 마을에서 장군만 4명이나 배출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들 장군들이 가슴에 단 별만 해도 10개나 돼 별들의 고향이라는 애칭을 가지기도 했다.

대장 예편한 진종채 전 2군사령관을 필두로, 중장 전역한 고 최경남 장군, 파나마 대사를 지낸 최석신 장군과 형제지간인 최석구 장군은 각각 소장과 준장으로 예편했다.

특히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운주산이 별 모양을 띄어 무관이 많이 나온다는 설이 있을 정도였다.

인비리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된 이유로는 산의 정기만 꼽히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부터 인비리는 운주산 동쪽 기슭에 자리해 죽장과 기북으로 통하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해 과거부터 교통의 요지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이렇다 보니 안강, 영덕, 청송으로 이어지는 역촌으로 이름을 날리며 수많은 말과 이를 돌보는 사람들이 모이면서 마을이 커졌다.

이에 따라 5일 장이 생기고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 고개를 넘나들며 호랑이를 잡기 위해 큰 틀을 놓는 등 호환을 물리치는 마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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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계 인비리 고인돌(왼쪽)과 학야리 고인돌.
◇선사시대부터 이어진 기나긴 역사

북쪽으로 시의 기북면과 죽장면, 동쪽으로 신광면과 경주시의 강동면, 남쪽으로 경주시의 안강읍, 서쪽으로 영천시의 임고면과 자양면에 접한 기계면은 크고 작은 산지로 비학산 주령으로 둘러 쌓여 동북방향으로 고지산(334.4m), 미현산(387.3m)과 이어지며 운주산(806m)의 남쪽은 영천시와 접경을 이룬다.

강원도부터 이어진 낙동정맥의 한 자락으로 이곳을 기준으로 동쪽으로는 강물이 흘러 동해로 흘러나가고 서쪽으로는 낙동강과 합류해 남해로 흐르는 갈림길이다.

비학산, 운주산 등 준봉이 사방을 호위하고, 그 가운데로 기계천이 만들어 낸 비옥한 옥토가 펼쳐져 있다.

역사도 오래돼 구석기 시대의 유적 등 선사시대의 유물이 끊이질 않는 곳이기도 하다.

구지리와 하대리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지표면에서 수집되는데 이는 함경북도 화대군 장덕리, 충남 공주읍 석장리, 제주도 애월면 빌레못 동굴을 비롯해 전국에 60여 곳에서만 발견되는 유물로 선사문화의 역사가 매우 깊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청동기 유적인 고인돌도 기계면에 다수 출토돼 가안리 14개, 남계리 5기, 인비리 23기, 지가리 13기, 봉계리 5기, 고지리 9기, 계전리 8기, 화봉리 1기, 문성리, 4기, 학야리 4기, 성계리 29기, 화대리 4기, 내단리 17기 등 136기의 고인돌이 발견됐다.

‘삼국사기지리지’에 신라의 모혜현 또는 화계현으로 불렸는데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인 기계현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의창군(흥해)의 영현이였다. 1018년 경주의 속현이 됐고 그 영역은 현재의 기계면과 기북면 지역이었다.

조선 시대에 기계현에 편입된 이후 기계면이 됐다.

이후 기계면은 청도군과 더불어 1970년대 근면·자조·협동의 3대 정신을 바탕으로 농촌근대화와 고도 산업화의 기틀이 된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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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출된 인재들

옛날부터 인물들이 많이 나오는 고장인 기계면은 고려 삼태사에서부터 근세에는 한국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장군들이 많이 배출됐는데 이외에도 시·군 통합 전 마지막 경주군수였던 이상화군수, 5공화국의 설계자이자 허화평 전 국회의원, 허명환 전 국무총리실 자치분권국장, 최대진 경북도 건설도시국장, 유승광 전 포항시 북구청장, 이치우, 이건춘, 김기곤, 이상범 전 포항시의원, 이상근 통일주체국민회의 영일군회장, 언론계의 큰 획을 그은 고 이진형 세대지 편집국장도 기계면 출신으로 유명인이다.

재계인사로는 포항상공회의소 회장이자 경북상공회의소협의회 회장을 맡아 지역의 상공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데 앞장서 온 윤광수 해광공영 대표이사를 비롯해 이덕우 덕양주식회사 명예회장, 이상정 ㈜무림교역 회장, 박상근 전 서광산업건설㈜ 대표이사, 이동찬 전 코오롱 그룹회장, 이상철 전 코오롱 그룹 사장, 이경우 동경물산대표, 손정익 칠성구두 사장, 원종국 세기냉동회장, 김유진 삼성물산 부회장, 김상두 무림산업 사장, 박상근 서광건설 사장이 기계에서 난 기업가들이다.

법조계에도 사법·행정 양 고시 합격 후 총무처 고시관장·중앙공무원교육원장·대전법원 판사를 지낸 고 류만곤 판사, 고 류용곤 마산 지검장이 있으며, 교육계 인사로는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와 나눔국민운동본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 손원호 교수, 교육부 장관을 지낸 고 손재석 위덕대 초대총장, 동국대 이사장을 지낸 불암사 회주 일면스님, 대한불교 진각종 통리원장이신 회정정사, 마지막으로 예술계에도 고 황우루 작사·작곡가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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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 인터뷰
 “배워야 한다는 면학 분위기가 조성돼 있어”

-기계면에는 왜 인재가 많이 나오는지.

△배워야 한다는 면학 분위기가 조성돼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아.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무언가를 배우는 데 어르신들이 너그러워 공부하려는 아이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릴 적 고향에 대한 기억은

△특별하게 기억에 남을 정도로 비범한 아이는 아니었어. 평범한 시간을 보냈지. 다만 아버지께서 시골 청년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훈장이시고, 어머니께서 한글을 깨우치신 당시 얼마 되지 않는 재원이셨기에 그런 영향을 어릴 때 많이 받으면서 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고향에 대해서.

△기계에 선산이 있지만 벌써 내년이면 80이니 고향에 정착하기는 너무 늦었지만, 대신 아들이 고향에서 자리 잡고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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