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에게 옥쇄를 넘긴 어린 단종의 애환 서린 곳…조선시대 3대 누정 건축물

경회루. 임금과 신하가 서로 덕으로써 만난다는 뜻이다.

□ 경회루에 무단 침범했다 출세한 구종직, 노비출신 조선의 미켈란젤로 박자청

세종 때 일이다. 교서관에 근무하는 말단 관원 구종직이 숙직을 하던 날이다. 밤은 깊어가고 인적이 끊어졌다. 구종직은 경회루의 풍광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기회가 오겠는가 싶었다. 임금이 사용하는 공간을 말단 관리가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 구종직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경회루에 들어갔다. 그렇게 아름다운 밤 풍경을 즐기고 있는데 왕이 산책을 나왔다. 딱 걸린 구종직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사죄했다. “신이 일찍이 경회루는 옥계요지(玉桂瑤池)며 천상선계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밤 예각의 숙직을 서게 되었사온데, 예각이 경회루와 그리 멀지 아니한 까닭으로 초야의 천한 것이 감히 몰래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왕이 엉뚱한 제안을 했다. 노래를 불러보라는 것이다. 격양가를 멋지게 불렀다. 왕이 다시 ‘춘추’를 외워보라 했다. 막힘없이 외웠다. 왕이 기뻐하며 어주를 하사하였다. 놀라운 일은 다음날 다시 벌어졌다. 경회루를 무단 침범했던 그는 벌 대신 특진 통보를 받았다. 그것도 정9품에서 종5품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 구종직은 성종때 좌찬성까지 올랐고 당대 석학이라는 서거정과 학문적 논쟁을 벌일 정도로 학식이 높았던 인물이다. ‘연려실기술’에 전하는 이야기다. 세종은 확실히 풍류와 학문을 존중하는 큰 인물이었던 것이다.

경회루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건축가를 만난다. 그는 조선의 미켈란젤로 박자청이다. 그는 노비출신으로 태조 이성계의 눈에 들어 무관의 말단 벼슬 자리를 얻은 뒤 남다른 충성심과 능력으로 신분을 수직상승시킨 인물이다. 그의 마지막 직급은 종 1품이었다. 그는 조선 초기 한양의 대다수 주요 건축물에 관여하며 이 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드러냈다. 경회루는 물론 창덕궁, 성균관문묘, 종묘와 사직단, 용산의 군자감, 청게천 준설, 살곶이 다리, 한양도성 보수 공사 등이 그가 주도한 건축공사다. ‘한양의 도시기획은 정도전이 했고 그 공사를 완성한 사람은 박자청이다’라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오직 토목의 공역을 관장한 공로로 사졸로부터 출세하여 종 1품의 지위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종과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 그가 죽었을 때 세종은 사흘간 조회를 중지시키고 손수 제문을 내렸으며 나라에서 장사를 지내도록 할 정도였다. 박자청의 손길을 거친 창덕궁, 종묘 조선왕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경회루
□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옥쇄를 넘긴 애환 서린 곳

경회루는 역사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1455년 윤 6월10일, 단종이 경회루에 올랐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사실상 정권을 거머쥐고 있는 상태에서 더 이상 왕위에 있기가 불안했다. 이때 수양대군은 경회루 아래 서 있었다. 단종은 예방승지 성삼문에게 옥새를 가려오라고 명했다. 옥새를 가져오던 성삼문이 경회루 연못가에서 옥새를 끌어안고 엎드려 대성통곡했다. 옥새를 받아든 단종은 경회루 아래에서 수양대군에게 넘겼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박팽년은 경회루 연못에 몸을 던져 죽으려고 했으나 성삼문이 “임금께서 아직 상왕으로 계시고, 우리가 살아있으니 아직 일을 도모할 수 있다.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면 그 때 죽어도 늦지 않다”며 극구 만류했다. ‘추강집’에 나온다. 이후 성삼문과 박팽년은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죽고 단종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갔다가 세조에 의해 죽었다.

경회루는 여수의 진남관, 충무의 세병관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누정 건축물로 꼽힌다. 이 가운데서도 조선시대 목조 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조선시대 3대 목조건물로는 경회루와 근정전, 종묘의 정전이 꼽힌다.

경회루의 역사는 조선의 역사만큼이나 파란만장하다. 현재의 경회루는 고종 4년 4월20일에 지은 것이다. 조선 초기의 경회루는 소박했다. 경복궁 창건 당시 태조는 편전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작은 누각을 세웠다. 그러나 너무 좁아 실제로 활용하기 어려워 방치하다시피 했다. 태종대에 들어와 방치된 누각을 다시 세웠다. 방치된 누각을 본 태종이 “아버지께서 창업후 세운 것인데 벌써 이렇게 되었는가? 농사철이 가까워오니 노는 자들을 시켜 빨리 수리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공사는 당대 최고의 건축자 공조판서 박자청이 맡았다. 공사는 1412년 4월2일 마무리 됐다.

“새로 큰누각을 경복궁 서쪽 모퉁이에 지었다.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는데 제도가 굉장히 커서 앞이 탁 트이고 시원스럽다. 또한 연못을 파서 사방으로 둘렀다. 궁궐의 서북쪽에 본래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임금이 좁다고 명하여 고쳐 지은 것이다” -태종실록-

자시문. 왕이 경회루로 들어가는 문이다.
□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 만나는 곳, 경회루


4월11일 공사에 참여한 인원을 초청하여 왕이 준공기념 연회를 베풀고 5월16일에 새 누각의 이름으로 ‘경회’ ‘납량’ ‘승운’ ‘과학’ ‘소선’ ‘척진’ ‘기룡’ 등의 이름을 제시하면서 하륜에게 루의 이름을 결정하라고 명했다. 하륜이 임금과 신하간에 서로 덕으로써 만나는 것을 의미하는 ‘경회’를 선택하고 기문을 지어 올리자 왕은 6월9일 세자 양녕대군에게 경회루 편액을 큰 글씨로 쓰게 했다. 7월19일에는 연못을 판 일꾼들에게 저화 1천장을 하사했다. 저화는 닥나무껍질로 만든 화폐로 고려말 공양왕 3년에 제조됐으나 태조 때 소각됐다가 태종에 이르러 하륜의 제의로 다시 발행되다가 성종 때까지 90년간 유통됐다. 처음에는 저화 1장에 쌀 2말의 가치가 있었으나 갈수록 화폐가치가 떨어졌다.

경회루는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완전 소실되면서 함께 폐허가 됐다. 숙종때 홍세태가 경북을 지나가면서 지은 ‘과경복궁유감’이라는 시에서 ‘누대있던 주춧돌에는 이끼만 끼고, 풀 가득한 연못에는 기러기 소리만 들리는 구나’라고 했고 겸재 정선이 그린 경복궁 그림에도 연못 옆으로 경회루의 돌기둥만이 외롭게 묘사돼 있다. 정조도 이곳을 지나면서 폐허가 돼버린 경회루 연못을 보며 쓸쓸한 감회를 감추지 못하고 시를 남겼다.

일백 시렁 높은 누각 아직도 옛 집터이고
열 길 속의 무늬 초석은 이것이 깊은 못일세
우리 조정 창업의 규모가 크기도 하여라
소자가 이제야 선왕의 자손 위한 계책 알았네


경회루를 다시 복원한 것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다. 태종 당시 양녕대군이 쓴 현판은 소실돼 찾을 수 없고 현재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위당 신헌이 쓴 글씨다. 경회루는 연못 안에 섬에 건축됐다. 1층은 화강암으로 민흘림 한 사각 돌기둥이 외부둘레에 배치됐고 원형의 돌기둥은 내부에 배열돼 있다. 2층은 나무기둥으로 만들어졌다. 2층의 누마루는 세부분으로 구획돼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마루가 높아진다. 외진, 내진, 내내진이라고 하는데 제일 안쪽이 임금이 앉은 자리다. 세공간 사이에는 분합문이 설치돼있어 문짝을 들어올리면 하나의 공간이 되고 문을 닫으면 세공간이 분리된다.2층 누각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낙양각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마치 사진 액자 틀과 같은 독특한 문양을 만들었다. 때문에 여기서 바라보는 풍경은 하나 하나 그림이 걸려 있는 액자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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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낙양각 중에서도 연못 안 두 개의 섬인 당주와 당주 너머로 보이는 인왕산이 절경이다.

경회루 연못은 남북 113m, 동서 128m의 네모난 형태다. 연못 동쪽에서 경회루 들어가는 다리는 세 개가 있는데 다리마다 문을 설치했다. 제일 남쪽에 있는 문이 자시문으로 다른 다리보다 폭을 넓게 하여 어도를 두었다. 가운데 문은 포용하고 너그럽다는 뜻의 함흥문, 가장 북쪽에 있는 문은 대인을 만나보는 것이 이롭다는 이견문이다. 고종때 만들어졌고 현대에 와서 복원했다.경회루 북쪽에 있는 육각정의 작은 누각은 하향정이다. 연꽃향이라는 의미다. 광복이후 이승만대통령이 물이 들어오는 용머리 조각 바로 옆에 세웠다. 이 대통령은 여기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당주. 경회루 연못에 있는 두개의 인공섬이다.
하향정. 광복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경회루 북쪽, 물이 들어오는 용머리 옆에 세운 작은 누각이다
김동완 자유기고가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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