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의 바다에 귀신고래를 부른다

귀신고래

‘동해 연안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았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서 해조를 따는데, 홀연 바위 하나가 나타나자, 이것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매, 사람들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여겨 왕으로 모셨다….’

위의 글은 고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신라 8대 아달라왕조에 나오는 것으로 현재 포항시 남구 동해면 도구리 해안이 역사의 현장이다.

그동안 이 글속에 ‘갑자기 바위가 나타났다’는 내용의 진실에 대해 여러 가지 설들이 나왔고 최근에는 ‘한국계 귀신고래’일 가능성이 제기된 데다 오호츠크해에서 귀신고래가 다시 발견되면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속에서 고래에 대한 이야기는 그다지 많지 않지만 울산시 반구대를 비롯 단편적인 사료에 따르면 동해는 고래의 바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고래가 서식했고, 우리 민족 역시 고래와 끊을 수 없는 끈끈한 관계를 맺어 왔음이 나타난다. 하지만 동해가 고래의 바다로 불릴만큼 많은 고래들이 서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에 나타나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울산 반구대 고래 암각화

기껏해야 신라시대때 동해를 경해(鯨海·고래바다)로 불렀으며, 고려조에는 원나라 다루가치들이 고래기름을 가지고 갔다는 것, 조선조에는 고래가 나타나면 관청의 착취가 두려워 아예 바다로 밀어냈다는 등의 이야기가 고작일 뿐이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긴수염고래, 범고래, 혹등고래 등 8종의 대형고래를 비롯 다양한 고래가 새겨져 있는 것은 물론 고래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고래별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포획 및 해체방법도 현대와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과학화돼 있는 등 우리 민족이 고래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지난 1848년과 49년 미국 포경선의 포경일지와 1899년 일본 포경선의 항해일지에 ‘아주 많은 대왕고래(a great many number or right whales)’ ‘영일만에 100여마리의 귀신고래떼’‘영일만 동북동 20마일해상 참고래떼 득실, 30~40마일에 걸쳐 고래뿐’이라고 적혀 있는 등 그야말로 동해가 고래의 바다였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와 더불어 국립수산과학원이 지난 99년부터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모두 35종의 고래가 발견돼 전세계에 분포한 80여종의 고래중 절반에 이르는 등 세계 유수의 고래서식지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걸쳐 외국 포경선들의 무자비한 고래잡이와 1946년이후 우리 어민들의 남획 등으로 동해를 가득 메웠던 참고래, 귀신고래 등 대형고래들이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특히 46년이후 1만5천마리의 밍크고래와 940마리의 참고래가 포획됐지만 크기조차 기록되지 않은 채 해체된 뒤 먹거리로 팔려나가는 등 우리의 고래들은 잊혀진 존재로 남았다. 하지만 고래기름이 없었다면 산업혁명도 우주개척도 이뤄지기 힘들었을 만큼 인류역사흐름의 중심에는 고래가 존재했고, 지금도 고래가 해양첨단과학과 생태계 연구의 중심에 있지만 우리는 지난해 2월에야 겨우 3명의 연구원으로 이뤄진 고래연구센터가 발족됐다.

그렇지만 동해의 고래부활이 결코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최근 수년간에 걸친 연구조사에서 비록 대형고래는 아니지만 밍크고래를 비롯한 3천마리이상의 고래가 확인됐고, 멸종위기종으로 명칭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 한국계 귀신고래 100마리가량이 오호츠크해 주변에서 발견된 것은 우리의 고래가 부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여기에다 열악하기만 하던 고래연구인력도 박사과정 2명을 비롯 석사과정과 학부, 그 외에 다른 분야에서 일하다 고래연구센터 발족소식과 함께 찾아오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김장근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센터장은 “역사기록을 보면 동해에는 긴수염고래를 비롯한 각종 대형고래가 즐비했지만 19세기이후 무자비한 남획으로 인해 씨가 말라 버렸다”며 “특히 고래는 산업혁명과 우주개척 등 인류역사의 흐름을 바꿔놓는 중추적 위치에 있었지만 우리의 고래들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갔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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