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술수와 난삽한 문화산업의 폐해 증언 장소…이순신의 명량대첩에 전함을 제공한 배설 장군

도남서당
경북 성주군 대가면에 도천서원이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다른 대부분 서원들과 마찬가지로 훼철되었다.

1774년(영조 50)에 건립되었던 도천서원을 대신해 후손들은 배설 장군 유허인 뒷개마을에 다시 도남서당을 세웠다. 서당이지만 강당의 왼쪽 뒤편에는 장군의 아들 배상룡을 기리는 사당도 있다.

마을 들머리에 숭조대, 즉 조상을 숭앙하는 곳이라는 이름의 비석군이 있다.

배설 장군의 아버지인 배덕문, 배설, 배설의 아우인 배건과 배즙, 그리고 배설의 아들인 배상룡 등을 기려 건립된 빗돌들이다. 배상룡을 제외하면 이들은 모두 과거 급제 후 출사를 했던 인물들이다.

특별한 것은 울산군수 등을 역임한 배덕문이 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했고, 그의 아들 배설, 배건, 배즙, 배력과 장손 배상룡이 모두 의병으로, 또 관군 장수로서 왜적 퇴치에 큰 공을 세웠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배상룡만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으며, 사당은 또 어째서 배상룡을 기리고 있는가 하는 점이 궁금하다. 배상룡은 한강 정구의 수제자였지만 아버지 배설 장군의 억울한 죽음 이후 세상에 뜻을 버리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과거를 보지 않았고, 학덕이 높은 선비로 사당에 모셔진 것이다.

숭조대
배설은 무엇이 억울한가? 우선 현대판 모함부터 살펴보자. 영화 ‘명량’ 이야기이다. 영화는 우리 수군이 왜선 위로 올라가 백병전을 펼침으로써 적들을 참살하는 장면을 무수히 보여준다. 그러나 100년 이상 통일 전쟁을 치른 일본군은 칼을 쓰는 데 있어 모두들 도사급이었고, 아군은 조선 건국 이래 200년 동안 큰 전란 없이 평화를 누린 탓에 전투력이 형편없었다.

백병전을 벌이면 백전백패였다는 말이다.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안택선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판옥선에 우수한 대포를 잔뜩 갖추고 있다가 먼저 화포 공격을 퍼부은 다음, 몸체로 박아서 적선을 부숴버리는 방법으로 싸웠다. 결코 백병전을 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바다에서는 백전백승을 할 수 있었다.

영화는 엉터리 줄거리도 생산했다. 왜군의 첩자가 된 경상우수사 배설이 명량 해전 때 이순신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들키자 도주하던 중 아군의 화살에 맞아죽는다는 설정이다. 하지만 배설은 첩자 노릇을 한 적도 없지만, 명량해전에 참전하지도 않았다. 그만큼 영화 ‘명량’은 역사 왜곡, 역사 조작을 서슴지 않았다. 돈벌이만 염두에 둔 난삽한 문화산업자본이 빚어낸 현대판 참극이었다.

게다가 배설은 조선 시대에는 저급한 정치판의 희생양이 되었다. 의병장 김덕령을 직접 때려죽인 선조는 이순신까지 죽이려다가 칠천량패전에서 원균이 전사하자 그를 졸병으로 만들어서 풀어준다. 이순신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다. 누군가는 이순신이 자살을 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종전이 되면 자신은 물론 자식들과 일가친척들까지 선조에게 죽임을 당할 판이니 혼자 죽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라도 살리겠다는 처절한 생각이었다는 해석이다.

배설 장군 묘소
그래도 선조와 집권세력들은 종전 이후 전쟁 피해에 대한 책임자를 조작했다. 자신들이 처벌을 받거나 자리를 내놓아야 할 자들이면서도 백성들에게는 누구누구 때문에 임진왜란의 피해를 겪었다고 호도하는 악랄한 정치를 펼쳤다. 노량해전이 끝나고 불과 한 달 뒤인 1598년 12월 23일, 어전회의는 배설을 역적으로 몬다.

“바다의 왜적은 물러갔지만 이제는 국내 반란을 예방해야 합니다. 지금 배설이 불순한 세력들과 연합하여 무뢰배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당시 병조판서였던 홍여순이 말하자 선조가 “죽여라” 하고 대꾸한다. 임진왜란 발발 전에도 1천여 선비들을 정여립의 반란 도당이라면서 죽였던 선조이다.

하지만 선조와 조정은 반역자라면서도 배설의 아버지와 아들은 무죄 훈방한다. 역적죄는 본래 직계 남자들을 모두 죽이는 형벌인데 왜 그렇게 하였을까. 게다가 아버지 배덕문, 배설, 배즙은 모두 공신 책봉 및 높은 벼슬을 추증받고, 일찍 전사한 배건도 병조참의를 추증받는다. 역적 집안치고는 정말 이상한 일이다.

마을 뒤쪽의 배설 장군 산소 옆 바위에는 ‘星山裵氏 世葬之地 周回二十里(성산배씨 세장지지 주회이십리)’가 새겨져 있다. 이곳 둘레 20리를 배씨들의 자자손손 묘지로 삼는다는 내용이다. 이 역시 역적 가문으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처럼,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정치판과 문화판을 휩쓸었고, 지금도 난무하고 있다. 배설이 목사를 지냈던 진주와 화개장터 일원에는 지금도 ‘대장도 싫소, 졸개도 싫소’ 하면서 배설 장군이 잡혀가는 장면을 풍자한 노래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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