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개의 달빛 맞으며 풍류 한잔…이태백이 부럽잖네

경포대는 경포호의 북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 경포호가 한눈에 들어오는 관동제일루로 꼽힌다.
경포대를 생각하면 연상되는 단어가 ‘경월(鏡月)’이다. 경월은 강릉을 비롯한 영동지방 대표 소주인데 풀어보자면 ‘경포호에 뜬 달’이다. 그 이름만 떠올려도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경포대에 홀로 올라 술을 마시며 호수를 내려다보곤 했다. 호수에 비친 달과 밤하늘에 뜬 달 그리고 내 마음속에 들어앉은 달이 ‘심월상조(心月相照)’하며 달 아래 홀로 술을 마시는 (월하독작)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라는 뜻의 경포호에는 네 가지 버전의 달이 뜬다. 하늘에 뜬 달이 하나요, 바다에 뜬 달이 두 번째, 세 번째는 호수에 뜬 달이다. 마지막 달은 술잔 위에 뜬 달이다. 하나를 더 한다면 당신의 눈동자에 들어 있는 달이다. ‘경포대에 뜬 달’은 곧장 이태백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을 불러낸다.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벗도 없이 홀로 마신다 / 잔을 들어 밝은 달맞이하니 /그림자 비쳐 셋이 되었네 / 달은 본래 술 마실 줄 모르고 / 그림자는 그저 흉내만 낼 뿐 /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하여 / 봄날을 마음껏 즐겨보노라 / 노래를 부르면 달은 서성이고/춤을 추면 그림자 어지럽구나’

경포대에서 바라본 경포호
경포호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경포호 자리는 본래 어느 부자가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하루는 중이 부잣집을 찾아 쌀 시주를 부탁하자 그 부자는 똥을 퍼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부자가 살던 집이 내려앉아 호수가 됐다. 쌓였던 곡식은 모두 조개가 됐다. 흉년이 드는 해에는 조개가 많이 나고 풍년이 드는 해에는 쌀이 적게 났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쌓아둔 곡식이 조개가 됐다고 적곡조개라 했다. 봄 여름이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주운 조개를 이고 지고 갔다. 호수 밑바닥에는 아직 기와 부스러기와 그릇들이 남아 있어 헤엄치는 사람들이 가끔 줍는다고 한다.

경포호 주변에는 볼만한 풍광 8가지가 있다. ‘경포팔경’이다. ‘녹두일출’은 호수 남쪽 해안의 녹두정(지금의 한송정 터)에서 보는 일출이다. 호수 동쪽에 있는 죽도에는 산죽이 무성하다. 죽도에서의 달맞이 광경이 ‘죽도명월’이다. ‘강문어화’는 강문 입구에 고깃배의 불빛이 바다와 호수에 비치는 모습이다. ‘초당취연’은 초당마을 저녁 무렵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다. ‘홍장야우’는 경포호 북쪽 언덕에 있는 홍장암에 내리는 밤비다. 호수 서북쪽 시루봉 일몰의 낙조 풍경은 ‘증봉낙조(甑峰落照)’라고 이름 지었다. ‘환선취적(喚仙吹笛)’은 시루봉 신선이 바둑을 두고 피리를 부는 신선경이다. ‘한송모종(寒松暮鍾)’은 호수 남동쪽 한송정에서 해 질 무렵 치는 종소리이다. 이 같은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경포호를 둘러싸고 금란정, 방해정, 해운정 등 12개의 정자가 들어섰다. 그중 대표적인 정자가 경포대이다.

이 아름다운 경관을 송강 정철이 놓칠 리 없다. 그는 ‘관동별곡’에서 경포대에서 본 경포호의 장관을 노래한다. 낙산사 의상대에서 경포대로 이동해왔다.

경포대 내부. 강산제일 현판은 명나라의 명필 주지번이 썼다고 한다.
사양 현산에 철쭉꽃을 짓 밟으며
우개지륜이 경포로 내려가니
십리빙환을 다리고 다시 다려
장송 울창한 속에 싫도록 펴쳤으니
믈결도 잔잔하구나 모래를 헤리로다
고주 해람하여 정자위에 오르니
강문교 넘은 곁에 대양이 여기로다
조용하구나 이 기상 넓고 아득하구나 저 경계
여기보다 갖춘 곳이 또 어디 있단 말인고
홍장 고사를 전한다 하리로다

경포대에서 본 조암. 정자의 현판 글씨를 우암 송시열이 썼다고 한다.
정철의 시 마지막에 나오는 ‘홍장고사’는 벼슬아치와 기생의 그 흔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홍장은 강릉에서 이름난 기생이다. 여말선초의 관리인 박신은 강원도 안렴사로 강릉에 갔다가 홍장과 사랑에 빠졌다. 박신이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게 됐다. 이를 안 친구 강릉부사 조운흘이 ‘서프라이즈’를 기획했다. 조운흘은 홍장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박신을 경포대로 불러 유선놀이를 했다. 홍장이 죽었다는 소식에 슬픔에 빠진 박신은 유선놀이가 즐겁지 않았다.

배를 타고 호수 어느 곳에 다다르니 신선이 거문고를 타고 피리를 부는데 그 가운데 아리따운 여인이 있었다. 박신이 배에서 내려서 가까이 다가가 보니 신선 분장을 한 홍장이었다.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서거정의 ‘동인시화’ 하편 67에 나오는 이야기다. 서울로 떠났던 박신은 순찰사가 돼 다시 강릉을 찾았고 홍장을 서울로 데리고 가 소실로 삼았다. 홍장이 경포대에 오면 반드시 어떤 바위 위에서 놀았는데 그녀의 이름을 따 홍장암이라고 한다. 홍장은 박신이 떠난 뒤 1년 동안 소식없는 박신을 기다리며 외로움을 달랬다. 그때 쓴 시가 전한다. ‘한송정 달 밝은 밤에 경포대에 물결 잔 제 / 유신한 백구는 오락가락하건마는 / 어떻다 우리의 왕손은 가고 아니 오는고’ 강릉시가 박신과 홍장의 러브스토리를 동상으로 만들어 경포호 주변에 포토존으로 설치해놓고 있는데 연인들의 사진 촬영장소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경포대는 강릉시 저도 경포호의 북쪽 언덕에 있다. 정면 6칸 측면 5칸에 기둥이 32개나 되는 팔작지붕 겹처마기와 구조다. 1326년(고려 충숙왕 13) 강원도 안렴사인 박숙이 신라의 사선(四仙)이 놀았다던 방해정 뒷산 인월사터에 세웠다가 1508년(중종3) 강릉부사 한급이 현재의 자리로 옮겼고 현재의 건물은 1745년( 영조21) 부사 조하망이 새로 지은 것이다.

조선후기 문신인 이익회가 쓴 경포대 해서체 현판
조선후기의 명필 유한지가 쓴 경포대 전서체 현판
경포대의 현판은 해서체로 쓴 것과 전서체로 쓴 것, 두 개가 있다. 해서체는 헌종때 한성판윤을 지낸 이익회(1767~1843)가 썼다. 이익회는 홍문관에 등용된 뒤 대사간 대사성, 홍문관제학에 올라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글씨에 능해 ‘삼우당문익점신도비’를 써기도 했다. 전서체는 유한지(1760~미상)가 썼다. 유한지는 서예가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영천의 ‘은해사영파대사비’ 와 산청의 ‘문익점신도비’ 등의 전액을 썼다. 정자 안에 있는 ‘제일강산(第一江山)’ 현판은 주지번의 글씨라고도 하고 양사언의 글씨라고도 한다. ‘강산’은 떨어져 나가 후세 사람이 쓴 글씨이다. 주지번은 명나라 산동 사람인데 서화가 뛰어났다.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 전주 객사의 ‘풍패지관’을 쓴 사람이다. 조선에도 많이 알려진 명필인지라 조선 사람들이 글을 구하기 위해 초피나 인삼을 들고 중국에 있는 그를 찾아갔을 정도로 유명했다.

▲ 글 사진 / 김동완 자유기고가
정자 안에는 숙종의 어제시, 조하문의 상량문, 율곡 이이가 10살 때 경포대 인근 오죽헌에 살면서 쓴 ‘경포대부’가 걸려있다. ‘여기에 한 누각이 호수에 임하여 / 마치 발돋움 자세로 날 듯하다/ 비단 창문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 누대의 단청엔 아침 햇빛 비춰주네 / 아래로는 땅이 아득하다 (중략)하늘은 유유하여 더욱 멀고 달은 교교하여 빛을 더하더라 ’ 조선시대에 경포대의 경치가 얼마나 뛰어났는 지 설명해주는 사례가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장유의 중수기다. 장유는 중수기에서 ‘태조와 세조도 친히 경포대에 올라 사면의 경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썼다.


속세는 간데 없이 온갖 선경이라
나오느니 서경시요, 들리느니 노래라
바다에는 갈매기, 호수에는 철새들이 쌍쌍이 날고
천병만마 늘어선 송림 사이로
거니는 선남선녀의 모습이 그림 같구나

-세조가 경포대에서 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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