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와 바람이 빚어낸 절경…海를 품고 해를 맞다

해암정은 바위산을 담장으로 삼고 거친 파도치는 바다를 정원으로 삼았다.
강원도 동해시 북평동 추암은 삼척시와 경계지점에 있다. 본래는 삼척이었는데 1980년 삼척읍 북평동과 명주군 묵호읍이 떨어져 나와 동해시로 통합되면서 지금은 동해시의 명물이 됐다. 추암역 아래 굴다리를 지나 개울길을 따라가면 수백개의 기암이 작은 산처럼 또는 병풍처럼 바다를 막아 서 있는 광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추암이다. 추암은 바람과 파도, 세월이 빚어낸 거대한 조각품이다. 어떤 바위는 삐죽삐죽한 송곳을 닮기도 하고 어떤 바위는 불상을 조각한 것 같기도 하다. 바위동산 전체가 금강산을 닮았다고 ‘금강산 미니어처’라고도 한다. 바위들은 저마다 기기묘묘한 자태로 버티고 서서 휘몰아치는 바람과 파도를 막아서고 있다. 바위를 때리고 바위 위로 솟아오르는 파도가 장엄하다.

해암정 뒤의 바위산과 바다
해암정은 그 기기묘묘한 바위 아래 엎드려 있다. 바위동산을 담장으로 하고 바위 너머 바다를 정원으로 삼았다. 정자 밖에서 보면 바위를 때리는 파도 소리가 우렁차다. ‘철썩철썩 쏴아’ 최남선이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표현한 그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정작 정자 안에 들어서면 적막하다. 신기하게도 파도 소리 같은 건 들리지도 않는다. 정자에 발을 들이는 순간 다른 세계에 들어선 듯 정적이 흐른다. 정자 천정에는 중수기와 시편을 새긴 현판이 빼곡이 들어서 있다. 


천 길 절벽은 얼음을 쌓아올린 듯
구름 낫 우레 도끼로 만들었나
발로 차며 못을 건너 뛰는 기린마요
옷을 걷고 놀다보니 바다에서 목욕하는 붕세로다
물결소리 글 읽는 것 같아 사전이 생각나고
파도는 붓 모양이루니 매승이 기억나누다
봉래산은 이리로 가야 하는데
능파대 보니 못가겠구나

- 택당 이식(1584∼1647)의 시-


해암정은 삼척심씨의 시조 심동로(沈東老)가 고려 공민왕 10년(1361) 관직을 그만두고 추암으로 내려와 건립한 정자다. 한림원사(翰林院使) 등을 역임했다. 고려 말의 혼란한 국정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왕이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동로(東老:노인이 동쪽으로 간다는 뜻)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그때부터 본명 한(漢 )대신 동로를 이름으로 썼다. 낙향한 후에는 후학을 양성하거나 풍월을 읊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왕은 그를 진주군(眞珠君)으로 봉하고 삼척부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다.

▲ 해암정은 고려 공민왕때 심동노가 관직을 떠나 후학을 양성하고 풍월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본래 건물이 소실된 후 조선 중종 25년(1530)에 심동노의 7대손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이 강원도체찰사로 부임하여 중건하고, 정조 18년(1794) 다시 중수했다. 1단의 석축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얹었다. 정자 뒤쪽에 있는 문을 열면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바위를 때리는 파도소리가 귀가 아플 정도로 요란하다.


장수가 던진 촉순이
용궁에서 더 올랐는지
하늘에서 어진 분이
술잔을 바다에 띄웠는지
다 실지 못했을 걸
수궁에도 대궐이 있으니
큰 벼루를 만들려 했던가
아니야, 옥이 아니면 저렇게 좋게 안나지
저 하늘이 종이 같으면
한 잔 들고 저 바다와 달을 읊을 걸

- 석천 임억령(1496∼1568)의 시 

해암정이 있는 곳은 동해판 ‘그리스 신화’가 전해온다.‘해상선구(海上仙區)’라 하여 신선이 놀던 곳이다. 서쪽 바위 위에는 신선들의 우차가 지나간 발자국이 남아있고 산위에는 용의 시체를 묻은 용묘가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가뭄이 심할 때는 여기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 해암정 동쪽 창을 통해 본 추암
정자 정면에는 세 개의 현판이 있다. 왼쪽 전서체‘해암정’은 시택 심지황이, 가운데 해서체‘해암정은 우암 송시열이, 오른쪽 초서체 ’석총람‘은 송강 정철이 썼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은 영의정을 지내다 2차 예송논쟁에서 패해 덕원으로 유배를 가던 중 이곳에 들러 현판 글씨를 썼고 시도 한 수 남겼다. ‘초합운심경전사(草合雲深逕轉斜)/ 풀은 구름과 아우르고 좁은 길은 비스듬히 돌아든다.’ 송시열의 유배길에는 따르는 문생이 많았다고 한다. 또 덕원에서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는 유생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조정은 그를 다시 포항 장기로 위리안치했다가 4년이 지나서 다시 거제로 보냈다.

재미있는 일은 예송논쟁의 결과로 얻은 삼척과 동해시의 어부지리다.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 허목은 1차 예송논쟁에서 패해 삼척부사로 좌천됐다. 그 결과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동해척주비’를 삼척에 남겼다. 죽서루의 ‘제일계정’도 그의 작품이다. 2차예송논쟁‘리턴매치’에서는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이 패해 덕원 유배가 결정됐다. 그 덕에 해암정 현판글씨와 시문이 동해시의 관광자원이 됐다.

동해시 추암은 삼척시와 경계지점에 있다. 삼척 수로부인 공원에서 본 촛대바위
정자현판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한명회의 ‘능파대기(凌波臺記)’다.“ 흡사 사람이 눕기도 하고 비스듬히 서 있기도 하는 것 같이 또는 호랑이가 끓어앉은 것 같기도 하고 용이 비틀거리는 것 같이 천태만상을 이루었으며 수나무가 우거져서 그 사이로 비치니 참으로 조물주의 작품이라 하겠다.강원도 경포대와 총석정과 그 경치가 비슷하며 기이한 점은 더 좋다 하겠다. 속되게 ‘추암’이라고 이름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고. 이제라도 자연에 대해 부끄럼이 없게 ‘능파대’라 하고 그 이름을 고치노라”

추암은 송곳바위라는 뜻이다. 한명회는 송곳바위가 못마땅했다. 속되고 촌스럽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그래서 ‘능파대’라고 이름을 고쳐서 기문까지 써서 걸었다.‘능파‘는 ’급류의 물결‘ 또는 ’파도 위를 걷는다‘는 뜻으로 미인의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뜻한다. 결과적으로 한명회의 개명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 김동완 자유기고가
해암정 동쪽 동산에 있는 추암촛대바위는 한국관광공사가 지정한 겨울에 가볼 만한 곳 10선에 드는 절경지다. 또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에도 들었다. 애국가 영상의 첫 소절 배경 화면으로 등장해 이름을 떨쳤다. 촛대같이 생겼다고 해서 이름 붙였다.촛대바위도 바위지만 그 옆에 시립해있는 바위들도 장엄하다. 하얀 수건을 던지면 쪽빛 물이 묻어날 것 같은 푸른 바다에 우뚝 서 있는 바위는 경외감까지 불러 일으킨다. 특히 촛대 바위에 달이 걸려있는 풍경과 어둠을 뚫고 해가 떠오르는 일출은 명승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700년 전 이 아름다운 곳에 정자를 짓고 안빈낙도 여생을 즐겼던 심동노는 이렇게 노래했다.

우거진 방초와 자욱한 구름 속에 길이 났는데
산 속에서 나오는 시냇물에 복숭아꽃 떠 있네
걷다가 우연히 바위가 앞길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개와 닭소리 나는 곳에 집이 너 덧 채 있네
일찍이 갈매기와 더불어 바닷가에서 늙으니
일생의 행적이 바람결 같구나
부귀공명은 다 헛된 일이니
매미껍질 벗듯이 일찍이 관직을 버렸오

- 심동로가 해암정을 지을 당시 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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