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운현 공공선 주변 흐르는 강 '조선하'

▲ 고조선의 유적 밀운현 공공성 위치.

조선 실학의 완성자라 해도 좋은 이규경(李圭景)은 그의 대저(大著),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단군은 구이(九夷)가 공동으로 세운 군장이며 조선은 이미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부터 그 이름이 나오는데, 연나라의 국경과 인접한다(燕之外郊) 면서, 산해경을 인용,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이요 산의 남쪽이라 하였다. 그리고 열양은 연(燕)에 속하고 조선은 옛 낙랑현이며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은 곳이라는 주석을 인용한다. 또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이 조선(東海之內 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이라 하고 그 주석에서 오늘의 낙랑군이다(朝鮮今樂浪郡也).” 한다. 주석자는 동진(東晋)의 대학자요 기사(奇士)인 곽박(郭璞)이다. 


옛 사서(史書)를 읽어보면, 고조선의 위치가 지금의 하북성과 북경 근처였다는 사실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너무나 많은 문헌상의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사학계는 고조선이 초기에는 요동에 있었으나, 연나라 진개의 침략 이후 대동강변으로 천도하였다는 ‘고조선 중심지이동설’을 주장한다. 연나라는 전국 7웅의 하나이며 진개는 연 소왕 때의 인물이다. 소왕이 제나라에 의하여 거의 멸망한 연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악의(樂毅)를 등용, 연,진(晋),조(趙),진(秦),초,한(漢)의 육국의 군대로 제나라를 공격하여 한 달 만에 잃어버린 국토를 되찾음은 물론이고 제나라 70여성을 탈취하였으나, 아들인 연 혜왕 대에 다시 제나라에게 빼앗겼던 역사가 있다. 빼앗긴 강토를 되찾기에 바빴던 연나라가 어찌 압록강 넘어 청천강까지 내려올 여유가 있었을까? 진개의 동방침략은 연의 국경에서 1천~2천리 지역으로서 지금의 요하부근까지 왔다고 본다. 연 소왕 이후, 아사달이 평양으로 천도했다면, 한나라와 삼국시대와 오호십육국 및 동진시대에도 고조선은 평양에 위치해야 옳다. 그러나 삼국시대 조조의 아들인 조비의 위(魏)나라와 사마염의 서진(西晋)은 낙랑을 비롯, 요동,창려,현토,대방 등 5개의 군을 평주(平州)에 배속시키고 있다. 즉,사마의(179~251)나 사마염(236~290)이 활동하던 시절, 낙랑은 평주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평주는 전호의 영평부 설명 참조)

역사문화연구소장 심백강(沈伯綱) 박사는 “사고전서”를 통하여 우리의 고대사를 상당부분 복원하였는데, 특히 ‘조선하(朝鮮河)’를 찾아낸 것은 대단한 일이다. 북송(北宋)의 “무경총요”에, 연경에서 “북문(北門)을 나와 옛 장성(長城)을 지나 망경(望京)까지 40리... 조선하(朝鮮河)를 지나 90리를 가면 북쪽으로 고하구(古河口)에 이른다.”하였고 통감강목 56권에, “조선 하를 지나, 90리에 호북구(虎北口)에 이른다. 평주의 노룡에 조선성(朝鮮城)이 있다”라 하였다. 조선하란 당연히 조선의 국경을 흐르는 강이란 것인데, 지금은 조하(潮河)로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 정형진(鄭亨鎭) 신라얼연구소장은 “삼국유사 황룡사구층탑조”의 ‘동이공공지족(東夷共工之族)’란 글에 착안하고 공공족이 우리의 조상이란 신념으로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며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는데, 몇 해 전 공공족이 중원에서 밀려났다는 밀운현을 방문하여 직접 조하와 조선성을 확인하였다. 정형진의 답사에 의하면, 하북성 밀운현 연락촌(燕樂村) 운봉산 아래에 공공성(共工城)이 있고 부근에 조하가 흐르는데, 이 조하를 막아 밀운수고(密雲水庫)란 댐을 만들어 북경시민의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한다. 북경에서 북으로 연산(燕山)을 넘으면 난하(?河)가 흐르며 그곳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다고 확인해 주었다. 조선하와 조선성, 그리고 갈석산이 모두 하북성내에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이곳에서 조선과 낙랑의 역사를 찾을 수 있다는 열린 안목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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