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 휘감아 도는 안락천과 드넓은 안강들판이 한 눈에

관가정은 정자와 살림집을 겸한 건물이다
관가정은 경주 양동마을 초입의 서쪽 언덕, 물봉동산 아래에 있다. 양동마을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이른바 ‘물(勿)’자 형국의 명당 터인데 그 첫 번째 획이 뻗어 내려오는 지점에 관가정이 자리잡았다.

관가정의 ‘관가’는 ‘농사짓는 풍경을 보는 정자’라는 뜻이다. 곡식을 심어 자라는 기쁨을 보는 것처럼 자손과 후진을 양성하겠다는 뜻이다.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이 지었다. 손중돈은 종가인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났으나 분가하여 관가정을 지었다. 서백당은 손중돈의 외조카 회재 이언적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건축 연도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손중돈의 아버지 손소가 서백당을 지은 때가 1458년 이므로 한세대 지난 1480년대로 보는 설(박선주, ‘조선시대 반가의 초기형식에 관한 연구’)과 1534년 손중돈 사후에 지어졌다는 설(전봉희, ‘ 조선시대 씨족마을의 내재적 질서와 건축적 특성에 관한 연구)이 있고 1514년(경주신문, 2013년 6월17일자)에 창건됐다는 설도 있다. 1514년에 건축됐다면 당시 손중돈이 예조참판을 역임하던 시절쯤 된다.

관가정 안채풍경
관가정은 정자이면서 살림집이다. 현존하는 살림집 중 임진왜란 이전에 지은 집이 10채 안팎인데 양동 마을에 네 채나 있다. 손씨 종가인 서백당과 이씨 종가인 무첨당, 관가정과 향단이다. 이 중 관가정과 무첨당, 향단은 보물로 지정됐다. 관가정은 오랫동안 서백당을 대신해 손씨 종가역할을 했다. 손중돈은 차남이었지만 맏형인 백돈이 장가들어 마을을 떠나면서 중돈이 종손역할을 맡았고 그후 대종가가 됐으나 20세기 초 서백당으로 종가를 옮겼다.

관가정은 물봉동산 꼭대기 바로 아래 자리를 잡아 정면으로 호명산, 왼쪽으로 양동마을의 안산인 성주봉을 바라보고 있다. 성주봉은 붓끝같이 생겼다고 해서 문필봉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양동마을에 손중돈과 이언적 같은 이름난 문사들이 많이 배출됐다고 한다. 서쪽으로 양동마을을 휘감아 도는 안락천이 내려다 보이고 앞으로는 드넓은 안강들판이 보인다. 동쪽 문을 나서면 향단이 이웃해 있으며 발아래 양동 초입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경승이다. 관가정으로 올라가는 길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는데 마을의 정자목 노릇을 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 아래서 동제를 지낸다.

관가정 앞에 있는 누운 향나무
정자목에서 관가정에 이르는 짧은 거리에 있는 4채의 초가집은 외거노비들이 살던 ‘가랍집’이다. 외거노비의 가랍집이 통행문 역할을 했을 것이므로 관가정에는 별도의 담장이나 대문이 없었으나 1980년대 이후 관리를 위해 담장과 대문을 설치했다.관가정은 ‘ㅁ’자 몸체에 앞 건물은 ‘ㅁ’자에 좌우날개를 뻗었다. 좌우 날개면에는 사랑채와 행랑채를 두었는데 정면에서 보면 서쪽 건물인 사랑채에 ‘관가정’ 편액이 걸려있다. 안마당에 붙어있는 몸채의 모퉁이에는 온돌방을 놓고 나머지 3면에는 모두 마루를 깔았다. 뒤쪽에는 영당을 두었다.

관가정 편액. 관가정은 농사짓는 풍경을 본다라는 뜻이다.
관가정은 농사짓는 풍경을 본다라는 뜻이다.
양동마을은 조선시대 외손들의 정착사를 보여주는 사례다. 손중돈의 아버지 송재(松齋 )손소(孫昭)는 청송에 살았는데 25살에 류복하(柳復河)의 딸에게 장가를 들면서 이 마을에 들어와 살았다. 류복하는 여말선초의 만호로 이 일대에 수많은 노비와 토지를 소유한 토호였다. 아내가 무남독녀인 탓에 손소는 장인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으면서 월성손씨 양동마을 입향조가 됐다. 손소는 21세 되던 1453년에 사마 양시에 합격했고 1457년 풍덕류씨 집안과 혼인을 하면서 경주 양동마을로 이거했다. 2년 뒤 과거에 합격해 문신의 반열에 오른다. 기록할 만한 일은 손소는 영남사림파의 영수인 점필재 김종직과 소과 대과의 동방이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고시 동기인 셈이다. 손소와 김종직은 30년 도의지교를 맺는다. 손소는 이후 승문원 정자, 승정원 주서 등 문신으로서는 엘리트 밟았다. 이시애의 난이 발발하자 평노장군 박종손의 종사관으로 참여해 난을 평정하고 적개공신 2등에 채훈됐다.
관가정 앞에 서있는 은행나무는 정자목으로 마을에서 동제를 지낸다

관가정의 주인 손중돈은 조선 중기 대표적 학자와 관료의 한사람이다. 그의 생은 세조에서 중종에 이르는 다섯 임금을 거쳤지만 주조 성종, 연산군, 중종까지 3대 동안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동생 계돈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만 20세가 되던 1483년(성종 20년) 식년 문과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선다. 조부 손사성, 아버지 손소에 이어 3세가 과거에 합격하는 경사(3세과경)가 났다. 성균관 학유, 학록을 거쳐 예문관 검열에 임명돼 춘추관 기사관을 겸임하며 한림직을 두루 역임했다. 중종때는 공조판서등 3조판서를 지냈고 도승지 3번, 대사헌을 네 번 지냈다. 조선 500년을 통해 청백리에 이름을 오른 사람은 모두 218명인데 손중돈은 중종이 천거한 35명 중 한명으로 청백리에 이름을 올렸다.

위기도 있었다. 연산군 시절이었다. 사간원은 간쟁과 논박을 담당하던 조선시대의 언론기관이다. 그는 사간원의 종5품 헌납이었다. 권력의 최상부에 있던 임사홍과 신수근에게 직격탄을 쏜다.

“전하께서는 대신과 문안에 의거해 처결하지 않고 위에서 홀로 결단하시니, 신은 전하께서 사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인상을 면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양희지가 시종으로서 전하를 만날 기회를 갖자 임사홍의 가자(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뺏은 것이 천견에 순응하는 것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면전에서 전하를 속인 것입니다. 마땅히 죄를 다스려야 하겠으며 신수근에 대하여도 역시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임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연산군 일기’ 권 25, 연산군 3년 7월 1일-

관가정에서 본 양동마을 풍경 왼쪽으로 안산이 성주봉이 보인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악행과 패륜적인 행동을 부추긴 간신의 대명사로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다. 갑자사화를 일으켜 정국을 피바다로 만든 인물이다. 신수근은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외손이자 연산군의 처남이며, 중종의 장인이다. 손중돈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손중돈은 연산군을 에워싼 임사홍 무리의 발호를 저지하게 더욱 강력한 비판을 쏟아낸다. 연산군이 신자건을 등용하려 하자 계를 올려 강력하게 반발한다. 신자건은 1491년 강원도관찰사로 재직 중 수령들로부터 뇌물을 받은 죄로 파직되어, 성종 당시 영구히 서용되지 못한다는 형을 받았던 사람인데 연산군이 이를 등용하려 했던 것이다.

1504년 연산군 폭정의 극점을 보여주는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갑자사화를 주도한 임사홍은 사림파가 국사를 비방했다며 이를 폐비사건과 동일하게 처리하고자 했다. 피화자 239명 중 122명이 사형을 당하거나 부관참시 되는 가혹한 숙청이었다. 당시 김해도호부사로 일하고 있던 손중돈은 파직을 당하고 의금부로 압송돼 김영정 김계행 등 전직 동료 대간 10여명과 함께 장 100대의 처벌을 받았다. 손중돈의 죄명은 ‘제서유위률’이었다. 제서유위률은 위법하게 소송을 심리한 소송관원, 정배죄인을 놓친 수령 에게 적용하는 죄명인데 임사홍을 탄핵했던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안락천은 양동마을을 감아돌아 형산강과 합류한다 관가정 서쪽 담벽에서 내려다본 안락천.

중종반정이 성공한 뒤 손중돈은 상주목사로 전격 임명됐다. 그는 2년 9개월동안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이 ‘거사비’를 세웠다. 선정에 감동한 중종이 비단을 하사하며 노고에 답했다.

“경상도 관찰상게 하서 하기를 ‘ 도내 진주목사 이우와 상주목사 손중돈은 근실히 봉공하여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게 하였으므로 내가 심히 이를 아름답게 여긴다. 각각 향표리 1습을 내리고 아울러 포서를 내리니 경은 나누어 주라’고 했다”
- ‘중종실록’ 권7, 중종 4년 1월 20일-

글 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손중돈은 외조카 회재 이언적의 스승이며 후견인 역할도 했다. 이언적이 동방오현, 조선의 18현에 드는 큰 인물로 자라기까지 손중돈의 역할이 컸다. 그는 이언적이 10살 때 아버지 이번이 죽자 경제적 지원은 물론 학문적 훈육을 도맡았다. 양산군수를 할 때도 상주 목사를 지낼 때도 부임지에 이언적을 데리고 다니며 교육했다. 이언적이 문과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랐을때도 자문과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 손중돈이 대사헌 재직시 인동부사로 나간 이언적이 치민의 도를 묻자 ‘노여운 마음을 삼하면 된다’고 자문했고 이언적이 사헌부 지평이 되어 정사룡을 탄핵코자 했을 때 그의 재능을 고려해 만류하기도 했다. 손중돈은 상주 목사시절 선정을 베풀어 상주 속수서원에 배향됐고 경주에는 후손들이 건립한 ‘동강서원’에 배향됐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