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죽음으로 끝난 우국충정 한맺힌 노래가락 들리는 듯

취가정 정면 네개의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 김덕령의 충성심을 노래했다.

자미탄(紫薇灘)은 광주천의 옛이름이다. 천변에 자미(배롱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서 그렇게 이름 붙였으나 광주호가 생기면서 광주천으로 이름을 바꿨다. 광주천은 광주의 진산 무등산에서 발원하여 동구 용연동과 학동을 거쳐 시가지 서쪽에서 극락천과 합류한 뒤 서구 유촌동에서 영산강으로 흘러든다. 영산강의 제1 지류이다.


광주천 중에서도 광주호 상류를 창계천이라고 하는데 이 일대가 호남가단의 성지이다. 창계천을 사이에 두고 광주와 담양이 갈라진다. 강건너 담양에는 소쇄원과 식영정이 있고 반대편에는 환벽당과 취가정이 있다.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식영정(息影亭)은 중종때 김성원이 장인 임억령을 위해 지었다. 송강 정철이 여기서 ‘성산별곡’을 지어 한국가사문학의 성지가 됐다. 성산은 식영정 뒷산이다. 식영정에는 임억령과 김성원 고경명 정철이 모여 성산의 경치를 1인당 20수씩 ‘식영정이십수’를 지은 곳으로 유명하다. 그 덕에 이들은 ‘식영정 사선(四仙)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얻었다. 식영정에서 광주호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강 건너 식영정 맞은 편에 광주시 북구 충효동 환벽당은 송강 정철이 스승 김윤제에게 공부를 배우던 곳이다. 27살에 관직에 나아갈 때 까지 여기에 살면서 김인후 기대승 등 명현을 만나 학문과 시를 배웠다고 한다. 당시 자미탄은 수량이 풍부해 나룻배가 다녔고 식영정과 환벽당 사이에는 무지개 다리를 놓아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들이 호남가단을 이뤘다.

환벽당과 함께 무등산 자락에 있는 취가정은 환벽당 남쪽 언덕 위에 있다. 식영정과 환벽당이 가사문학의 성지로 인정 받으면서 주목을 끌고 있는데 비해 취가정은 다소 주목을 받지 못하는 듯하다. 이 정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하던중요한 인물의 이야기가 있다. 정자가 세워지게 된 동기도 신비롭다.

취가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하다 서른의 나이에 모함에 걸려 죽은 충장공 김덕령(金德齡1567~1596)을 추모하기 위해 1890년 후손 김만식 등이 세운 정자다. 정자의 이름은 송강 정철의 제자였던 석주 권필(1569~1612)의 꿈에서 비롯됐다. 권필은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을 받기 싫어해 벼슬도 하지 않고 야인으로 지낸 사람이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죽은 김덕령이 나타나 한맺힌 노래를 한마디 불렀다.

▲ 김덕령이 권필의 꿈에 나타나 읊었다는 취시가 시비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게 취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또한 뜬구름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이 노래 아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내마음 바라기는 긴 칼로 밝은 임금 바라고저

- 취시가(醉時歌) - 

취가정 안에서 내려본 풍경. 자미탄을 뒤로 하고 정자 앞의 들판을 내려 보고 있다.

꿈속에서 김덕령의 노래를 들은 권필은 이렇게 답했다. “지난날 장군께서 쇠창을 잡으셨더니 장한 뜻 중도에 꺾이니 천명을 어찌하랴” 권필은 광해군 때 척족의 방종을 비판하는 시를 썼다가 친국을 받고 귀양하다 동대문 밖에서 전송나온 사람들이 건네준 술을 폭음한 뒤 다음날 죽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정자 이름은 김덕령이 권필의 꿈에 나타나 불렀다는 취시가에서 따왔다. ‘취가정’ 편액은 설주 송운회가 썼다. 송운회(1874~1965) 는 영재 이건창의 문하에서 학문과 서예를 익혔고 주로 해, 행, 초서를 썼다. 그의 진초는 ‘선의 경지에 이른 신필’이라고 평을 받았다. 보성에 살면서 열심히 글씨를 썼으므로‘보성 강물이 온통 설주 선생의 붓 행구는 먹물’이다 라는 말이 들었다.
취가정은 무등산 자락 야트막한 언덕에 있다.


송운회는 정자 정면의 네 기둥에도 주련을 남겼다. ‘충관일월(忠貫日月)/ 충성을 해와 달을 꿰고’‘기장산하(氣壯山河)/ 기개는 산과 강을 뒤덮었도다’ ‘취가어지(醉歌於地)/ 취한 채 땅에서 부른 노래’ ‘성문우천(聲聞于天)/ 감동해 하늘도 들었구나’

김덕령은 1593년 어머니 상중에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선조로부터 형조좌랑 직함과 함께 충용장 군호를 받았다. 다음해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에서 용맹을 떨쳐 익호장군 초승장군 군호를 받았다. 그후 의병장 곽재우와 함께 권율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를 맡았다.

김덕령의 어이없는 죽음은 전쟁이 끝난 뒤에 찾아왔다.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영화 ‘그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이몽학의 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는 전쟁 중에 공을 세운 신하와 장수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일등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이 98명이었다. 그중 80명이 자신의 몽진을 도운 신하와 의주까지 호송한 환관이었다. 목숨 걸고 전쟁에서 싸운 무신은 18명에 불과 했다. 이런 차별에 불만을 품고 충청도 부여에서 일어난 것이 ‘이몽학’의 난이다.

이몽학의 난을 토벌하라는 명이 김덕령에게 떨어졌다. 김덕령은 부대를 이끌고 부여로 향했다. 김덕령이 온다는 소문이 반란군에게 전해지자 이몽학 무리는 혼란에 빠졌다. 이몽학이 난을 일으키면서 김덕령이 자신과 함께 거사 하기로 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이몽학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안 부하들이 이몽학의 목을 베는 바람에 반란은 쉽게 제압됐다. 남원까지 갔던 김덕령은 진주로 돌아갔다.

사단은 반란군 취조과정에서 일어났다. 반란군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곽재우와 김덕령이 동조세력이라는 허위 자백이 나왔던 것이다. 김덕령은 선조의 친국을 받는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여섯차례에 걸친 혹독한 고문을 했다. 살이 터지고 뼈가 부스러지는 고문 끝에 그는 마침내 29살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고문을 받으면서 그는 죽음을 예감했다. 절명시 한 수를 남겼다.

취가정은 술에 취해 부르는 노래라는 뜻인데 솔주 송운회의 글씨다.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내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 김동완 자유기고가
김덕령은 1661년(현종2)에 신원이 돼 관작이 복구되고 병조참의에 추중됐다. 1681년(숙종 7)에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88년에는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됐다. 부조특명(국가에 공훈이 있는 인물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서 지내게 하던 특전)이 내려졌다. 광주의 벽진서원에 제향됐으며 이듬해 의열사로 사액됐다.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있는 1975년 충장사를 세웠다.

충장사 경내에는 김덕령의 영정과 교지가 봉안되어 있는 사우 충장사,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과 해설비, 유물관, 충용문, 익호문 등이 세워져 있다. 유물관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된 ‘김덕령장군’ 의복과 장군의 묘에서 출토된 관곽, 친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당 뒤쪽 언덕에는 김덕령의 묘와 묘비가 있으며 가족묘도 조성되어 있다. 광주 중심상권인 충장로 길이름은 그의 시호 충장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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