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의 푸른 꿈 간데없고 쌓이는 세월에 그리움만 켜켜이

▲ 금수정은 영평천이 굽어지는 절경지위에 있어 ‘영평8경’중 2경으로 꼽힌다.
경기도 포천시는 내(川)를 안고(抱) 있는 도시다. 들어오는 물은 없고 나가는 물만 있는, 물을 품고 있다가 내주는 지역이다. 물을 품고 있는 곳은 국사봉과 자등현, 광덕현이다. 국사봉은 산내천에 자등현과 광덕현은 영평천에 품었던 물을 내준다, 산채천과 영평천은 합류해 연천군 신답리 아우라지 나루터에서 한탄강으로 흘러들기까지 풍성한 수량으로 절경을 빚어냈다.

산내천과 영평천이 빚어낸 수려한 경관이 ‘영평8경’이다. 영평8경은 백로주, 선유담, 와룡암, 창옥병, 청학동, 금수정, 낙귀정지, 화적연등이다. 우거진 숲, 맑은 물, 기암괴석, 병풍같이 우뚝한 절벽을 찾아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미수(眉?) 허목(許穆1595~1682),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1651~1708)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1716~1787) 같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와 시를 읊곤 하였다.

특히 선조 때 영의정을 14년이나 지낸 박순은 은퇴 후 아예 영평8경의 하나인 창옥병 절벽벽 위에 집을 짓고 살다가 생을 마쳤다. 그의 행장에는 “선조 19년(1586]) 가을, 휴가를 받아 영평의 초정에 목욕하러 갔다. 이때 영평현의 백운계에 은거할 배견와(拜鵑窩)와 이양정(二養亭)을 짓고, 백운계·청령담(淸?潭)·토운상(吐雲床)·창옥병(蒼玉屛)·산금대(散衿臺)·청학대(靑鶴臺)·백학대(白鶴臺) 등의 명호를 제(題)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영평8경 중 몇 개는 박순의 제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금수정 앞에서 본 영평천
영평8경 중 2경이 ‘금수정’이다.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영평천이 아름답다. 강은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굽어져 내리다가 금수정 앞에서 동쪽으로 흘러 내려가 한탄강과 합류한다. 정자 아래에는 전복을 엎어 놓은 듯한 하얀 바위들이 햇빛에 반사돼 눈부시다. 금수정은 본래 고려 말기 학자 척약재(?若齋)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의 소요처다. 그의 호 ‘척약재’는 백문보가 김구용의 서재에 써 준 ‘척약재기’에서 땄다. ‘척약’은 ‘걱정하고 두려워하다’라는 뜻이다. 백문보는 소년급제한 김구용이 자만하지 말고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하라며 경계의 글을 써줬다. 그가 호를 척약재로 정하자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과 친분이 있는 이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금수정은 고려말의 학자 김구용과 조선명필 양사언의 흔적이 있는 경승지이다.
“열 눈이 보고 있고 열 손이 가리키네. 전전긍긍 자신을 지탱하며 처음처럼 끝까지 삼가시게”(한복) / “범의 꼬리를 밟은 듯 살얼음을 건너듯이 정밀하게 살피시게”(이색) / “마음 혹여 놓으면 살타래처럼 엉키리니 반드시 일삼아서 종일토록 애쓰오”(정도전) “저 물도 밤낮을 쉬지 않고 넘실넘실 흐르는데 그대 마음 흔들리면 핼맥은 막히리”(정몽주)라고 매사 조심하라는 뜻을 전했다.

그는 삼봉 정도전과 특별한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정도전에게 보낸 몇편의 시가 보인다. 보주(예천의 옛이름)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만나지 못하자 시를 써서 정도전에게 보냈다.

“평원에서 한 번 이별한 후 / 함께 회포를 나누지 못한 지 오래이네/ 떠돌다 보니 사람은 늙어 가는데/ 애쓰다 보니 한해가 바야흐로 다하네/ 화군에는 수 많은 산들이 둘러 있는데/ 구성에는 하나의 길이 통하네/ 양양은 이미 지났으니 / 어찌 마음 속이 부끄럽지 않은가” (안동에서 삼봉에게 답하다)

김구용은 고려 공민왕 때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한 뒤 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직강에 올랐다. 정몽주, 박상충, 이숭인 등과 더불어 성리학을 일으키고 불교를 배척하는 척불숭유의 선봉에 섰다. 그는 원나라를 밀어내고 중국을 장악하기 시작한 명나라와 친교를 하자는 친명파였다. 원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일은 극굴 반대하다가 6년 동안 유배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누명을 뒤집어쓰고 중국에서 병사했다. 1384년 명나라와 국교수립을 위한 행례사로 가던 중 요동에서 백금 1백냥과 세모시, 마포 각 50필을 지참했다는 누명으로 체포됐다. 그후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명으로 대리위로 유배되던 중 영녕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고려말 관료이던 척약재 김구용의 시비.
그때 지은 시가 ‘범급(帆急)’이다. 금수정 앞 뜰에 있는 시비 속의 시를 읽는 내내 마음이 짠했다.

“돛단배 빠르니 산이 달아나는 듯/배가 가니 강기슭 절로 옮기는구나./지나는 고장 따라 그 풍습을 묻고 / 배 대고 머무는 곳에서는 시 지을 수밖에 / 오 나라 초 나라 강남 땅 천년 오래이고/ 여기 자연은 5월이 가장 좋은 때라 하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싫어 말게나 / 맑은 바람 밝은 달이 나를 따르고 있으니.”

금수정의 두번째 주인인 양사언의 시비
금수정의 본래 이름은 우두정(牛頭亭)이다. 김구용은 금수정이 있는 자리가 소의 머리를 닮았다고 말하곤 했는데 아들 명리가 은퇴후 아버지를 기려 이곳에 정자를 짓고 ‘우두정(牛頭亭)’이라 이름 하고 우두정이라 이름했다. 세종때이다. 우두정을 금수정으로 바꾼 이는 안평대군 김구 한호와 함께 조선 4대 서예가로 불리는 봉래(蓬萊)양사언(楊士彦·1517∼1584)이다. 양사언은 포천 안동김씨의 외손이었는데 무슨 연유인지 정자가 양사언에게 넘어왔다고 한다. 정자의 주인이 된 양사언은 안동김씨의 ‘김(金)’과 정자가 있는 창수면의 ‘수(水)’를 따서 ‘금수정’이라 이름했다. 외가쪽에서 정자를 얻고 보니 마음이 짠했던 모양이다. ‘이 정자는 안동김씨의 정자다’라는 마음을 담았을 터.

금수정은 양사언이 안동김씨의 금과 창수면의 수를 따 지은 이름이다.
양사언은 정자 편액은 물론이고 정자 동북쪽 아래 절벽에 ‘금수정’ 각자를 쓰고 금수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 가운데 바위에도 ‘부도’라는 글씨를 새겼다. 정자 앞에 전복처럼 엎어져 있는 하얀 바위이다. 양사언이 썼던 편액은 6·25 때 정자가 불타면서 없어지고 현재의 편액은 정자 아래 바위에 새겨진 각자를 본따 써 붙인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989년 남아 있는 기단과 초석, 관계문헌을 통해 복원했다. 건물 구조는 정면 2칸 측면 2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 형태다.금수정의 빼어날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 박순 이덕형 한석봉 이서구등 당대의 시인묵객이 찾아왔다.

우두정 물가 집에 자주 묵으니

풍토에 대해 보고 듣는 것 많아졌네

마을 사람들은 늘 범과 표범에 대한 걱정을 말하고

시냇가 아낙네는 유행하는 화장을 모른다네

숟갈로 나무 허리를 깎아 흰 꿀을 거두고

마을 밖에서는 메조를 찧는 절구소리 들리네

늙은이는 새로 와서 하는 일이 없으니

책상 위에는 먼저 약재 캐는 책을 펼치네

-박순의 시 ‘우두정에 의지하여 머물다’

정자아래 양사언이 쓴 금수정 각자.
사암 박순은 영의정을 14년간 지내다. 중앙정치무대의 피말리는 당쟁을 보고 정치를 그만두기로 했다. 천연사라는 스님을 만나 영평에 정착한다. 그해가 1586년인데 양사언이 죽은 지 2년 되는 해다. 창옥병 절벽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우두정에 자주 들러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시를 짓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는 시에서 우두정 물가 집에 자주 묵는다고 했는데, 그집이 우두정 옆에 있는 ‘포천 안동김씨 고가터’일 것이다. 안동김씨고가터는 조선시대 포천지역에 거주했던 안동김씨의 고택으로 2004년 발굴조사를 통해 안채와 사랑채 등의 초석이 발견되었다. 고가에는 예부터 많은 선비들이 찾았던 곳으로 외부 손님들이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한음 이덕형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금빛 물결과 은빛 모래 한결 같이 평평하고

골짜기 구름과 강가에 내리는 비에 백구가 더욱 선명하네

참됨을 찾아 우연히 무릉도원 길을 찾아가니

고기배 보내지 마라 산촌마을에 가네

- 이덕형의 시 ‘금수정’

글 사진 / 김동완 여행작가
금수정 내부에는 눈길을 끄는 현판이나 시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금수정 앞마당에는 이곳이 김구용이 소요하던 곳이며 한때 양사언의 정자였음을 증명하기 위해 두 사람의 시비가 건립됐다. 양사언의 시비는 그 유명한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사람이 오르지 않고 뫼만 높다 하더라’ 시조가 새겨져 있다. 김구용의 시비는 앞에서 언급한 ‘범급’이다. 타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누명을 쓰고 유배를 떠나는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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