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동상

김진혁作

꽃보다 어여쁜 섬으로 간다. 파도 일렁이는 부두에 찢어질 듯 나부끼는 깃발을 보면, 살아 움직이는 섬으로 왜 떠나야 하는가를 실감한다. 난 설레는 가슴을 안고 섬으로 쏜살같이 달음박질한다. 뱃전에 하얗게 부서지며 출렁이는 파도도 나에겐 신선한 감동이다. 낯선 섬으로 떠나는 여정은 삶의 또 다른 쉼이다.

섬은 큰 맘 먹어야 갈 수 있다. 배를 타고 오갈 수 있는 섬은 뱃멀미가 따른다. 특히, 비바람이 조금이라도 몰아치면 오가는 배가 전면휴업이다. 육지와 동떨어진 섬은 시종일관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망망대해에 당그라니 고립된 느낌과 동시에 예상 밖의 묘한 해방감을 준다. 나는 지금 투박한 자연 그대로의 섬으로 간다.

섬은 잔재미가 있어 즐겁다. 불리는 이름만 들어도 흥미롭고 가고 싶은 꿈이 생긴다. 메밀처럼 생긴 매물도와 졸고 있는 사람 같다는 조름도, 볼기짝을 닮은 볼개섬이 있다. 소나무가 무성한 송도와 꽃이 많이 핀 꽃섬 이런저런 섬 길을 걷다보면, 신선한 감성이 생기리라. 오늘은 황금빛 자라를 닮은 아름다운 섬, 금오도로 찾아든다.

황금빛 자라섬은 마치 기다림 가득한 연인을 만나러 가는 듯 설렌다. 가는 길은 멀고 지루하지만 소중한 만남이 있기 전에 기다림이라는 시간을 배워버린 느낌이랄까. 마냥 멀게만 느꼈던 거리가 한결 짧게 섬 가는 포구에 와 있다. 느닷없는 비 소식에 걱정 반 설렘 반의 심정으로 두 눈을 연신 비벼 가며 새벽길을 나선 것이다. 꽤 긴 시간 달려온 수고에 비해 배 타는 거리는 단조롭고 밋밋하다.

섬엔 시종일관 색다른 매력이 있다. 여객선 위에서 여명의 빛을 마주한다. 드넓은 수평선에 섬과 행복한 해후다. 동행자 얼굴에도 밝은 미소로 가득하다. 금오도로 드는 시간은 책갈피에 꽂아 둔 옛 사진을 마주하는 듯 좋다. 비렁길 옆으로 억새가 바람에 출렁이고 참새들은 그 위를 날며 한껏 재주를 뽐내는 곳이다. 바다를 안고 돌다가 다시 벼랑길을 등에 지고 돌아야 하는 길이다. 인생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비탈길을 몇 번이고 헉헉대며 오른 후 다시 잰걸음으로 내려서리라. 험한 낭떠러지에 끊어질 듯 이어지는 비렁길, 지금 그 위에 선 나는 대자연 일부로 작은 존재임을 절감한다.

드디어 금오도 비렁길 걷기에 든다. 여천 부두를 시작으로 신포리까지 걷는 생존의 길이다. 길 일부는 아담진 돌담길과 애틋한 밭고랑 사이로, 파도치는 벼랑 옆으로 아기자기하게 오르내리는 길이다. 이런 절벽길이 바로 비렁길이다. 인간 삶에 우여곡절을 알려주듯 비탈진 밭도랑엔 갯기름나물이 소곳소곳 고개 숙인 채 앉아 있다. 그 길을 친우와 총총대지 않고 느리게 거닌다.

비렁길엔 섭섭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두포리를 출발하여 고갯마루를 넘으면 직포해변에 닿는다. 노송 옆 구멍가게에 들려 방풍나물에 칼국수를 먹고 일어났다. 몽돌 해안을 맨발로 걷고 싶어서다. 동선의 제약이 없을수록 비렁길은 푸지게 좋은 맛이 생기리라. 바다에선 허벅지만 한 숭어가 펄쩍펄쩍 뛰어올라 유혹하고, 멀리 배 한 척이 물살을 하얗게 가르며 지나간다.

비렁길만의 특별한 맛을 누린다. 섬의 손을 꼭 잡고 걷는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누리고 싶다. 언젠가 소리 없이 품을 나갈 텐데 마음껏 안아주고 사랑하리라. 절벽아래 파도가 일렁이는데 조용하다. 길 위에 보이는 풍경은 맨살을 드러낸 절벽뿐 간간이 보이는 이어진 섬뿐이다. 걷다 뒤를 보니 한 사람도 보이질 않는다. 분주한 몸과 마음을 편안히 내려놓는다.

하늘의 섭리를 비렁길은 전한다. 불혹(不惑)이라는 말을 알게 된 무렵부터 정신이 헷갈리어 갈팡질팡 헤매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도무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무엇하나 확신이 없던 그 시절에 불혹이 되면 정말이지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인 줄 알았다. 지금 불혹을 넘은 나이이다. 이젠 이순(耳順)이 서서히 다가오니 짙은 해무에 바다 가운데 발이 묶여 오도 가도 못 하던 지난날이 동풍 불던 시절로 여긴다. 비렁길 위 바닷바람에 몸을 맡기고 서 있으니 지나온 세월과 온갖 시름을 잊은 듯 청쾌하다.

비렁길 걷기는 삶의 다른 표현이다. 아니 그 길은 일상이 존재하기 위한 생존의 길이다. 걷기가 힘들수록 먹먹한 가슴이 열리고 심장에 뜨거운 혈류가 흐른다. 몸이 호사하려면, 굳이 집을 떠나지 않아도 좋다. 푸른 하늘과 잔잔한 파도 소리, 때 묻지 않은 에굽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언덕배기에서 조용하고 평온한 시간이 흐른다. 갯가에 묶인 작은 배는 파도 소리에 맞춰 삐걱거리며 춤을 춘다. 나 또한 섬에 살포시 안겨 버린 듯 후줄근하던 마음이 한결 개운하다.

어여쁜 섬은 메마른 삶을 일깨워주는 공간이다. 비탈진 언덕을 만나면 지레 겁을 먹고 이따금 포기한다. 다시금 한 발을 사푼 내딛으며 걷기에 몰입하면 한치 앞 오르막이 평지나 다름없다. 조금 버거운 길을 벗어나면 보상해 주듯 몸을 친친 감은 속박을 벗어던진 채 자유로이 창공을 걷는 듯하다. 비렁길 바다는 삶을 다시 청명하게 한다. 시간이 지나 창연히 서 있는 노목 아래서 옆지기와 흔들리던 시절을 되돌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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