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에 대한 규정 없어 악용 가능…개표도 못한 투표에 수억원 낭비
무분별한 청구 방지 대안 시급해

생활폐기물에너지화시설에 반대하는 포항시 오천읍 주민들이 18일 오전 포항시 남구 문덕리 부영사랑으로 2차아파트 제 10투표소에서 시의원 주민소환 투표를 하고 있다. 이은성 기자 sky@kyongbuk.com
명확한 기준도 없이 시행되고 있는 ‘주민소환에 관한 법률’로 인해 주민 분열과 시민 혈세만 낭비, 법 제도 개선 필요성이 제기됐다.

포항시 남구선관위는 지난 18일 ‘오천생활폐기물에너지화시설(SRF)반대 어머니회’가 청구한 포항시의원 주민소환 투표결과 전체 유권자 4만4036명 중 21.75%인 9577명만 투표함에 따라 관련 법규에 따라 개표 없이 마무리 지었다.

현행 주민소환법 제 22조(주민소환 투표결과의 확정) 2항에는 주민소환투표자 수가 전체 투표권자의 3분의 1에 미달할 경우 개표를 하지 않도록 해 놓았다.

결국 SRF반대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구한 경북·대구 지역 초유의 주민소환 투표는 오천읍민들 간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의 골만 깊이 패인 데다 무려 5억1000여만원의 시민 혈세만 낭비하고 말았다.

문제는 이번 주민소환 투표 이후 이어질 후폭풍이다.

주민 소환 투표가 지역 주민 간 의견 충돌과 무관심으로 개표조차 못 한 채 마무리됐지만 주민 분열과 혈세 낭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어 앞으로 특정한 목적 아래 주민소환제도를 악용할 우려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주민소환 청구의 명확한 요건조차 갖추지 않은 주민소환법의 허술한 제도에 있다.

지난 2007년 시행에 들어간 주민소환법 상 주민소환 청구는 주민소환투표청구권자(유권자) 총수의 15%(지방자치단체장) 또는 20%(지방의원)이상 서명만 받으면 가능하도록 돼 있다(법 제 7조).

하지만 어떤 경우에 주민소환 청구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청구사유 규정은 어디에도 없다.

시간을 거슬러 주민소환법이 최초로 발의된 지난 2004년 지병문 국회의원과 2005년 강창일 국회의원이 대표발의한 법률안에는 청구사유가 명백히 규정돼 있었다.

지병문 의원안의 청구사유는 △법령 위반·직무에 관한 의무 위반 및 태만·지방자치법 규정 위반·주민투표법 위반, 강창일 의원 안에는 △직권남용이나 직무유기 또는 그 밖의 위법·부당한 행위 △지방의회의 비효율적·비합리적인 운영으로 인해 의회운영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경우로 명시해 놓았다.

그러나 2006년 이영순 국회의원 대표발의안부터 청구사유가 사라진 뒤 국회 행자위 대안(현행 법안)에서도 청구사유 없이 제정됐다.

국회가 주민소환법을 졸속으로 제정하면서 주민소환청구 서명인 수만 채우면 어떤 이유든 주민소환이 가능하도록 해 놓은 셈이다.

여기에 주민소환 투표결과 투표인 수 부족으로 아예 개표조차 진행하지 못하면서 5억1000만원의 시민 혈세를 날아갔지만 이를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처럼 지역 최초로 열린 주민소환투표가 법률상 미비점으로 인해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되면서 관련법제도 개선 요구가 잇따르고 있다.

가장 먼저 주민소환투표 청구사유에 대한 명확한 기준문제다.

현행법은 청구요건을 제시하지 않아 특정단체나 개인이 특정한 목적으로 악용하더라도 제재할 방법이 전혀 없다.

따라서 지병문·강창일 국회의원이 대표발의안에 반영된 청구요건과 같이 명확한 기준을 정함으로써 특정목적으로 악용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주민 의사에 부합하지 않는 무분별한 주민소환 청구에 대한 책임 요구문제다.

포항시는 이번 선거에서 법 제 26조 규정에 따라 5억1000여 만원의 시민 혈세를 선거관리비용으로 지급, 가뜩이나 열악한 시 재정을 더욱 압박하는 원인이 됐다.

특히 주민소환투표가 개표조차 하지 못한 채 마무리되자 일각에서 ‘일반 민사재판도 패소자에게 재판경비를 부담토록 하는 데 개표도 못한 투표에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잘못됐다’는 비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따라서 투표인 수 부족으로 개표조차 못할 경우 청구인에 대해 비용을 청구토록 함으로써 무분별한 주민소환을 자제토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편 오천 주민소환 청구 이후 지역 법조계와 선관위 측도 “주민소환 청구사유가 명시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으며, 이를 명시할 경우 선거관리 사무도 한층 수월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었다.

이종욱 기자
이종욱 기자 ljw714@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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