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 화인의원 원장
이재원 화인의원 원장

우리나라 도시의 행정구역 또는 교차로 등에 붙여진 이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방위개념 혹은 숫자개념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동구, 서구, 남구 그리고 북구 등은 방위개념에 입각해 붙여진 이름들이고, 삼거리, 사거리, 아니면 오거리 등은 몇 갈래 길인지를 따지는 숫자개념에 따른 이름들이다. 그러다 보니 이 도시에도 동구가 있고 저 도시에도 서구가 있는가 하면, 삼거리, 오거리라 불리는 지명이 다른 도시들에서도 똑같이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붙여진 지명이 전국적으로 200개가 넘는다고 하니 가히, 같은 이름, 다른 지역, 즉 동명이지(同名異地)가 많은 나라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이름들은 사실상 행정의 편리함 때문에 아무런 고민 없이 붙여진 이름들일 뿐, 그 지역 고유의 정체성과는 전혀 무관한 이름들이다.

사람의 이름을 연구하는 성명학(姓名學)처럼, 옛 지명부터 지금의 지명에 이르기까지 지명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지명학(地名學, Toponymy)이 있다. 지명을 통해 그곳의 문화발달 과정의 흔적을 찾거나, 어원 분석을 함으로써 그 이름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를 살피고, 지명이 그곳의 사회적, 행정적 기능면에서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지명학이 하는 일이다. 따라서 지명학의 연구대상이 되는 지명은 당연히 그 지역의 정체성을 알 수 있는 이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지명 자체가 하나의 문화유산이라 할 만한 것들이다. 방위개념이나 숫자개념에 따라 지어진 단순지명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근래 들어 지명학이 발달한 선진국들 사이에서 없어지거나, 유명무실해진 지명을 복원하거나 보존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한 것도 지명이 가지는 역사의미와 문화가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지역이든 그 지역만의 자연적 특색이 있고, 전해져 오는 그곳만의 풍습이 있으며, 살아온 고유의 생활문화가 있을진대, 그 지역의 자연, 역사, 그리고 문화와는 태생적으로 거리가 먼 이름들이 지역에서 아직도 버젓이 통용되고 있는 것에 대해 이제는 진지한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 2018년 인천광역시 남구는 구 명칭을 ‘미추홀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꿨다. 보통은 행정구역이 통폐합되거나 나눠진 경우에 이름이 바뀌기도 하지만, 자치구 스스로 명칭을 바꾼 사례는 그 이전까지 한 번도 없었다. ‘미추홀’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인천 최초의 지명으로 ‘물의 고을’이란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고을의 발상지가 바로 남구에 위치한 문학산 일대였던 것이다. 그러니 해당구청이 스스로 무의미한 단순명칭을 버리고 지역의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이름을 되찾고자 했을 때, ‘미추홀’이 지역주민들로부터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전남 화순군의 경우에는 관내 4개면(동면, 이서면, 남면, 북면)에 대한 명칭변경을 추진하면서 지난 2월 해당지역 주민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주민 반대가 많은 동면을 제외하고 대다수가 찬성한 남면과 북면에 대해 각각 ‘사평면’과 ‘백아면’으로 이름을 바꾸기로 하고 관련 조례와 규칙을 개정해 내년부터 시행키로 했다고 한다. ‘사평면’은 그 곳에 위치한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손꼽히는 ‘사평역’에서 따온 것이고, ‘백아면’은 그 지역에 있는 대표 명산인 ‘백아산’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지역에 걸맞은 이름을 제대로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지역에서도 지명을 변경한 비슷한 사례가 없지는 않다. 전국 해맞이 명소 중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호미곶’이 바로 그 경우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이곳을 ‘장기’라는 당시 지명에 일본식 행정명칭인 ‘갑’을 붙여 ‘장기갑’으로 불렀다. 하지만 해방 이후 50년 넘게 불리어지던 그 지명을 지난 2001년 ‘호미곶’으로 바로잡고, 2010년엔 행정구역 명칭 역시, ‘대보면’에서 ‘호미곶면’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행정당국의 소신과 주민참여만 있다면 지역에서 별다른 의미 없이 통용되는 지명을 얼마든지 유의미한 것으로 바꿀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 사는 곳엔 으레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 이야기를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그곳 지명이다. 그러니 도시를 이루고 있는 각 지역의 이름만으로도 도시 전체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어야 스토리텔링이 있는 도시라 할 것이다. 우리 지역이 ‘철의 도시’에서 이야기가 있는 ‘문화도시’로 새롭게 도시브랜드화 해나가는 지금, 이제라도 그릇된 지명을 제대로 고쳐 쓰는 것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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