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영 측우기, ;공주감영 측우기'로 명칭바꿔 국보 승격
대구 선화당·창덕궁측우대 2점 명칭 변경 후 승격 예고

대구감영 측우대 측면
‘대구 선화당 측우대’(보물 제842호)등 ‘조선 과학기술 상징’ 현존 유일 측우기와 측우대가 국보가 된다

조선시대 발전한 과학기술을 상징하는 유물로,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 유일하게 현존한다고 알려진 측우기(測雨器)가 국보로 승격된다.

문화재청은 기상청에 있는 보물 제561호 ‘금영(錦營) 측우기’를 ‘공주감영 측우기’라는 명칭으로 바꿔 국보로 승격 예고했다고 30일 밝혔다.

아울러 측우기를 놓는 받침인 측우대(測雨臺) 중 기상청 소장 ‘대구 선화당 측우대’(보물 제842호)와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창덕궁 측우대’(보물 제844호)도 ‘대구감영 측우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로 각각 이름을 변경해 승격 예고했다.

금영 측우기는 48년, 측우대 두 점은 34년 만에 보물에서 국보 승격을 앞뒀다.

강수량을 측정하는 장치인 측우기는 영화 ‘천문’ 주인공인 세종 재위기에 처음 제작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4년(1442) 기록을 보면 “서울에서는 쇠를 주조(鑄造)하여 기구를 만들어 명칭을 측우기라 하니, 높이가 1자(尺) 5치(寸)이고 직경이 7치입니다. (중략) 객사의 뜰 가운데에 대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 위에 두도록 합니다”는 내용이 있다.

금영 측우기는 조선시대 충남 지역을 관할한 공주감영, 즉 금영에 설치됐다. 1915년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가 반출했다가 1971년 한국에 돌아왔다.

청동 재질 금속기 3단으로 나뉘며, 중단 바깥쪽에 새긴 글자인 명문(銘文)을 통해 헌종 3년(1837)에 만들었음이 확인된다. 실록과 마찬가지로 높이 1자 5치, 지름 7치이며, 무게는 11근이다. 오늘날 치수로 환산하면 높이 31.9㎝, 지름 14.9㎝, 무게 6.2㎏이다.

원통은 지면과 완전한 수직을 이루지 않고, 상부가 다소 넓고 하부가 좁다. 접합부는 대나무 마디처럼 만들어 형태가 바뀌지 않도록 했다.

또 바닥 면에는 통인(通引), 급창(及唱), 사령(使令)이라는 직책을 지닌 사람들이 관련 업무를 맡았음을 알려주는 글을 남겼다.

문화재청은 측우기 국보 지정 예고에 앞서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함께 과학 실험과 조사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측우기 접합부는 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납땜을 하고, 몸체 자체가 강수량을 아는 척도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측우기와 함께 지정 예고된 대구 선화당 측우대는 1770년 5월에 화강암으로 제작했고, 창덕궁 측우대는 1782년 만들어 이문원 앞에 둔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 선화당 측우대는 앞쪽과 뒤쪽에 ‘측우대’(測雨臺) 글자를 새겼다. 이 측우대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규격이다. 윗면 길이가 36.7㎝, 폭이 37㎝이며, 가운데 구멍 지름은 15.5㎝이다. 전체 높이는 46㎝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시행되지 못한 측우 제도가 영조 대에 부활했는데, 당시 측우기에 사용하도록 한 척도인 포백척(布帛尺)이 적용됐다고 설명했다. 측우대 높이를 1자로 규정했는데, 포백척 1자가 46㎝이므로 선화당 측우대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국보 승격을 앞둔 측우기와 측우대 2점은 제작 시기와 연원이 명확하고, 세계 과학계에서 인정한 문화재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국내외에 알릴 필요가 있다”며 “예고 기간에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정 여부를 확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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