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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단] 빈 상자
[아침시단] 빈 상자
  • 배연수
  • 승인 2020년 01월 05일 16시 11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1월 06일 월요일
  • 1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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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와서 빈둥거리기 좋은 크기의
빈 상자가 하나 있습니다

우울한 기분을 따서 넣으면
짙은 보랏빛으로 안전하게 시들어갈 수 있는 깊이입니다

곁눈질만 하고 있는 내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리고 보았습니다
모서리마다 확고했던 각이
슬며시 닳아져 버린 것을

당신은 알고 있나요?

늦은 저녁은 꼭 그만큼
아침을 당겨준다는 말

낡은 상자를 앞에 놓고
고양이를 기다립니다

만나자마자 일생을 다 살아버릴
늙은 연인을 기다립니다
 

<감상> 낡고 빈 상자는 아마 간절하게 기다리는 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일 게다. 고양이는 발랄하고, 앙큼하고, 마음을 줄듯 말듯 애태우는 그대일 게다. 그대가 오면 딱 알맞은 상자의 크기, 노을 가득히 보랏빛으로 물든 상자의 깊이, 모든 걸 다 갖추고 기다리는 내게 그대는 끝내 오지 않는다. 마음의 각은 허물어지고, 기다리던 숱한 밤은 아침을 일찍 불러들이고, 세월은 야속하기만 하다. 그대 오기를 기다리다 일생이 다 지날 것만 같은, 사랑하기에 너무 늦을 것만 같은 늙은 연인을 오늘도 기다린다. 기다림은 희망을 전제로 하기에.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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