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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단] 불면
[아침시단] 불면
  • 김예강
  • 승인 2020년 01월 07일 16시 36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1월 08일 수요일
  • 1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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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그림을 그린다
그림이 지우개 없이 지워진다

코끼리 다리를 그리면 코끼리 다리는 지워지고 코끼리
눈은 끝내 얼굴에 그려지지 않는다. 얼굴을 그리면 얼굴이
지워진다. 눈동자만 그려지는 그림을 그린다. 손을 그리면
손가락 다섯 개는 손이 되지 않고 지워진다. 얼굴보다 먼
저 밤이 그림을 지운다.

그리지 않아도 그림이 그려진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너는 앞에 서 있다. 보내지도 않았는데 너는 가고 없다.
보고 있을 뿐인데 가고 없는 얼굴들 대낮보다 더 환한 밤,
그림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대로 잠들게 하소서
얼굴 없이 어디까지 와 있는가?

<감상> 밤이 그림을 지우는 역할을 하므로 밤에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점안(點眼)하듯 눈동자만 그려지고 얼굴의 윤곽은 잘 잡히지 않는다. 어떤 사물도 그려지지 않고 밤의 그림이 지우개 없이 지워지고 만다. 역설적이게도 그리지 않아도 그림이 그려지는 사람이 있다. 모든 사물과 현상이 그대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그대는 내 앞에 서 있다. 얼마나 그리움이 간절하면, 그림 속이나 꿈속이나 이미 들어와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대의 모습이 꿈에 가득하면 차라리 잠 깨지 말았으면 좋겠다. 꿈속까지 어둠의 지우개가 찾아와 그대의 얼굴을 지울까 봐 두렵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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