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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근대미술사] 4. 포항 화단 壇 형성의 선구자 '서창환 화가'
[경북·대구 근대미술사] 4. 포항 화단 壇 형성의 선구자 '서창환 화가'
  • 박경숙 큐레이터, 화가
  • 승인 2020년 02월 11일 21시 41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2월 12일 수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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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문화예술 인물 산실 포항 현대 화단 기반 마련
서창환

포항 현대화단의 시작은 외부 지역 미술교육자들의 활동과 후학의 양성으로 맥이 이뤄졌다. 그 첫 중심인물이 서창환이다. 서창환(1923~2014)은 외부에서 온 화가이자 교육자이지만, 우리 지역 자생적 화단 형성에 있어 선구자적인 인물로 기록된다. 1947년을 시작으로 포항중학교 미술교사를 10여년 이상 근무하면서, 그가 배출한 제자들과 전시 활동들의 업적들은 실질적으로 포항현대화단 형성에 기반이 됐다.

1923년 함경남도 흥남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서창환은 18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학부 미술과를 졸업(1943년)하고 해방 직전에 귀국했다. 토지개혁 때 고향에서 추방돼 월남했으며, 1946년 4월 영주농고 미술교사로 첫 부임하고, 이어 1947년 포항중학교로 옮겨 재직했다. 이후 대구에 정착해 오랫동안 교육자와 화가라는 길을 걸어왔다.

“대구·경북지역 미술계에 수 많은 미술인들을 배출했지, 사회 지도층 인사들도 학창시절 나의 가르침을 통해 인성을 완성했어. 후배를 양성하는 것은 선구자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라고 서창환은 교육자로서 보냈던 지난날의 소감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또한 그는 왕성한 작품제작과 활동으로 대구시 미술대전과 경상북도 미술대전의 심사위원·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미술 인구 저변확대에 힘써 미술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95년 대백갤러리(포항 대백쇼핑)에서 서창환의 초대전이 열렸다. 서창환은 전시 기간 동안 남다른 패션 감각으로 멋스러움과 신사다움을 잃지 않으시면서 많은 사람들을 맞이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포항·대구에서 내로라하는 문화예술계 사람들이 참석해 조그마한 전시장이 매일 가득했고, 전시 기간 동안 제자들의 발 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 서창환의 존재감과 포항과의 인연이 특별하고 남다른 것을 알게 됐다. 특히 그가 배출한 제자들이 전시장에 자주 와서 우리 지역 과거사에 대해 많은 담화를 나누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이 들려주었다. 지역 근·현대사를 비롯해 사회정치사, 문화예술사, 지역 대표적 인물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듣게 됐다. 마치 옛날 옛적에 캄캄한 겨울밤에 할머니가 이야기 보따리 풀어헤치듯 재미있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때 들은 이야기들이 나에게는 지역 과거사에 대한 호기심, 특히 문화예술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자료수집과 인물 조사에 실천적인 행동을 하게끔 만든 전시회였다.

서창환.

서창환이 포항중학교 미술교사로 오기 전까지는 우리 지역 문화예술의 환경은 암흑기이었다.

당시, 흥해 출신인 한국미술의 거장인 장두건은 대구 공립상업고등학교시절부터 우리 지역을 떠나 1937년 일본 태평양미술학교 수학, 1950년대 프랑스 유학 생활, 그리고 귀국 이후 수도권에서만 활동했으므로 자생적인 지역화단 형성에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던 시기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7년 서창환의 포항중학교 미술교사 부임은 실질적으로 포항현대화단의 서막을 여는 계기가 되는 셈이었다.

서창환의 10년간의 업적은 지역출신 제자 1호 배출과 신 미술문화의 소개 그리고 지역에서 개인전 9회 개최, 그리고 외부 작가들의 지역 영입 등은 미술문화 환경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요소를 서창환에 의해 비롯됐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점은 단지, 미술교사로서의 직업의식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문화예술의 본질을 꿰뚫고 실천했다는 점에서 그가 존중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그의 업적을 요약해 보았다.

서창환과 제자들과 함께

첫 번째의 역할은 포항 지역문화예술가 인물들의 배출이다. 권창호(전 포항문화원장), 최규열(전 KBS대구방송국장), 김두호(화가), 노태룡(화가), 이방웅(화가) 인물들이다. 그가 배출한 1호의 제자들은 많은 가지를 뻗게 해 오늘날, 자생적인 포항문화예술의 시대를 열어 가는 데 중요한 인재를 키워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1947년 포항중학교에 재직하며 발표한 첫 전시는 우리 지역에 신 미술을 처음으로 선보였다는 점이다.

당시, 인구가 고작 3만여 명의 작은 어촌지역에 전시라는 개념이 전무한 환경에서 서양화라는 그림은 생소한 충격을 안겨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를 통해 제1의 지역 미술 후학도인 김두호·노태룡·이방웅 제자들에게는 수채화·유화·데생·크로키 등 다양한 장르에 대한 지식과 안목에 눈을 뜨게 만들어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무엇보다도 투철한 작가정신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제9회 개인전 홍보지

세 번째, 서창환 선생의 1947년부터 2002년까지 우리지역에서 9회의 개인전시는 전시공간사에 대한 흐름을 고스란히 엿 볼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해 준다.

1947년 포항영일군청 회의실에서의 첫 개인전은 비록 초라한 공간이었지만 우리 지역 첫 전시공간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952년 청포도다방, 1957년 포항애린예식장, 1966년 청포도다방, 1968년 태양다방, 1976년 천마화랑, 1981년 포항화랑, 1995년·2002년 포항대백갤러리의 개인전은 고스란히 포항 전시공간역사임을 증명한다.

서창환 화가 작품.

네 번째는 척박한 우리 지역 문화 환경에서 그의 개인전은 대구의 내로라하는 많은 화가들을 우리 지역으로 불러 모으고, 아름다운 환경을 알리는 데 일조했다. 이를 계기로 대구지역 작가들에 의해 포항 화단사에 중요한 역사적인 작품들을 남기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점이다. 1950년대~1960년대의 죽도시장, 구룡포, 칠포, 송도 등 지역 명소들은 김우조(판화가), 이경희(수채화가) 작가들에 의해 지역 풍물과 자연을 배경으로 많은 명작들을 남기게 했다. 이러한 일면들은 서창환의 젊은 시절을 우리지역에 고스란히 애정을 쏟아 부었다고 엿 볼 수 있고, 이로 인해 품격 높은 포항 근대미술사가 성립됐다.

서창환은 평생 나무와 숲만 그려 왔다.

서창환 화가 작품.

“내 그림은 인간의 삶의 의미를 나무에 의탁하고자 하는 나의 신앙고백이야” 나무는 겨울에 죽음을 맛봤다가 날이 따뜻해지면 꽃이 피면서 다시 소생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힘든 고통의 시간을 참고 견디면 행복이 찾아온다’라는 신념을 가진 그는 1960년대 중반 무렵부터 나무 그림을 추구하게 됐고, 신비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독특한 화풍을 창조해 내었다. 그의 그림들은 태초에 자연이 그러한 환경에서 존재한 듯한 순수한 영혼을 간직한 나무들이다. 즉, 우리 삶 속의 풍경으로서의 대상이 아닌 신비함과 영적인 울림을 자아내는 생명의 나무인 것이다. 그가 앙상한 나목을 줄곧 그리게 된 밑바탕에는 현실을 초월하려는 간절한 정신과 그의 체험담에서 나온 신념에서 만들어졌다.

그의 윤택한 어린 시절과 유학생활, 그리고 해방 후 고향에서의 강제 추방으로 혹독한 시련 속에서 얻은 포항에서의 교사직업은 비록, 생계를 위한 방편이었지만 우리 지역 입장으로선 미술문화의 기반과 환경을 가꾸어 나가는 업적을 남기게 되는 전환점이 됐던 것이다. 이러한 고통과 힘든 환경 속에서 그가 보여준 활동들은 개인적으로나 지역 문화예술 차원에서나 이상과 현실에 대한 갈등과 고통에서 피어난 결정체인 것이다.

서창환은 지역 출신 화가 장두건과도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평소 서창환은 장두건의 예술세계를 존경했으며 따르고 좋아했다. 장두건이 1984년 이형회 (以形會)를 창립할 때부터 타계할 때까지 장두건을 모시며 회원으로 함께 활동했다. 이러한 일면들도 서창환이 포항미술사에 중요한 기록으로 작용 되어 문화도시로서의 발전에 자양분으로서 그의 영향력은 지금도 소리 없이 이어지고 있다.

박경숙 큐레이터·화가
박경숙 큐레이터·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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