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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일' 조선기대 축우기와 축우대 국보 승격
'세계 유일' 조선기대 축우기와 축우대 국보 승격
  • 곽성일 기자
  • 승인 2020년 02월 20일 21시 44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2월 21일 금요일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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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시기 등 명확…인류 문화사 가치"
대구감영 측우대 측면. 문화재청 제공.
‘대구 선화당 측우대’와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등 조선시대에 제작된 강수량 측정 기구인 측우기(測雨器) 1점과 측우기를 두는 받침인 측우대(測雨臺) 2점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됐다.

문화재청은 기상청이 소유한 ‘금영(錦營) 측우기’와 ‘대구 선화당 측우대’,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창덕궁 측우대’를 각각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라는 명칭으로 바꿔 국보 제329∼331호로 지정했다고 20일 밝혔다.

측우기와 측우대가 국보로 지정되기는 처음이다. 보물 지정 이후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49년, 측우대 두 점은 35년 만에 국보가 됐다.

조선 과학기술을 상징하는 문화재로 널리 알려진 측우기와 측우대는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 재위기에 처음 만들어졌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4년(1442) 기록에 “서울에서는 쇠를 주조(鑄造)하여 기구를 만들어 명칭을 측우기라 하니, 높이가 1자(尺) 5치(寸)이고 직경이 7치입니다. (중략) 객사의 뜰 가운데에 대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 위에 두도록 합니다”는 내용이 있다.

문화재청은 측우기 국보 지정에 앞서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함께 과학 실험과 조사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측우기 접합부는 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납땜을 하고, 몸체 자체가 강수량을 아는 척도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1770년 5월에 화강암으로 제작했고,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는 1782년 만들어 이문원 앞에 둔 것으로 추정된다.

경상감영 측우대는 앞쪽과 뒤쪽에 ‘측우대’(測雨臺)라는 글자를 새겼고, 제작 시기를 알려주는 ‘건륭경인오월조’(乾隆庚寅五月造)라는 문구가 있다.

윗면 길이가 36.7㎝, 폭이 37㎝이며, 가운데 구멍 지름은 15.5㎝이다. 전체 높이는 46㎝다. 이러한 규격은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시행되지 못한 측우 제도가 영조 대에 부활했음을 증명한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근대 이전 강수량 측정 기구 중 세계에서 유일하게 현존한다고 알려졌다. 조선시대 충남 지역을 관할한 공주감영에 설치됐는데, 1915년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가 반출했다가 1971년 한국에 돌아왔다.

청동 재질 금속기 3단으로 나뉘며, 중단 바깥쪽에 새긴 글자인 명문(銘文)을 통해 헌종 3년(1837)에 만들었음이 확인된다. 실록과 마찬가지로 높이 1자 5치, 지름 7치이며, 무게는 11근이다. 오늘날 치수로 환산하면 높이 31.9㎝, 지름 14.9㎝, 무게 6.2㎏이다.

원통은 지면과 완전한 수직을 이루지 않고, 상부가 다소 넓고 하부가 좁다. 접합부는 대나무 마디처럼 만들어 형태가 바뀌지 않도록 했다.

또 바닥 면에는 통인(通引), 급창(及唱), 사령(使令)이라는 직책을 지닌 사람들이 관련 업무를 맡았음을 알려주는 글을 남겼다.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에는 측우 역사를 알려주는 명문이 있다. 명문에 따르면 세종 대에 처음 구리로 측우기를 만들었고, 1770년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경희궁·팔도·강화부·개성부에 설치했다. 또 1782년 여름에 기우제를 지내자 비가 내렸고, 정조 명으로 이문원 뜰에 측우기를 뒀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이번에 국보가 된 측우기 한 점과 측우대 두 점은 제작 시기와 연원이 명확하다”며 “인류 문화사 관점에서도 가치가 있는 유물을 국보로 지정해 우리나라 전통과학 우수성을 알리고자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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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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