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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광장] 축대를 쌓고 콩밭을 일구어, 학교를 세우다
[아침광장] 축대를 쌓고 콩밭을 일구어, 학교를 세우다
  •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 승인 2020년 04월 16일 16시 56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4월 17일 금요일
  • 1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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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1911년 봄 경학사(耕學社) 조직 당시 결의했던 5개 항에는 ‘생존을 이어갈 산업 육성’과 더불어 민족 인재 양성에 대한 구상도 들어있었다. ‘학교를 설립해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한다’는 조항이었다. 이는 1913년 석주 이상룡이 ‘敬告南滿洲僑居同胞文’(남만주 거주 동포들에게 삼가 고하는 글)에서 다시 한번 강조한 부분이기도 하다. 학교설립에 대한 구상은 만주 망명 초기부터 이루어졌고, 곳곳에서 결실을 맺었다. 그 가운데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전쟁을 수행한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러한 위상에 견주어 초기 설립과정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그나마 김대락(金大洛, 안동)의 ‘백하일기(白下日記)’(1911~1913)가 없었다면 정확한 설립 날짜조차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주 망명 초기 3년의 일을 당일당일 기록한 ‘백하일기’의 사료적 가치는 그만큼 높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자료편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학교설립과 관련된 기록은 1911년 5월 21일(음 4월 23일) 처음 등장한다. 이날 이동녕·장유순이 김대락의 집에 와서 학교설립에 관한 일을 논의하였다는 내용이다. 이어 6월 10일(음 5월 14일) 추가가(鄒家街)에서 학교의 문을 열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김대락은 이날 오후 학교에 직접 들렀다고 하였다. 그런데 학생들의 실질적인 개학은 6월 21일(음 5월 25일)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오늘이 개학이라 하여 어린 손자가 함께 추가가의 신흥학교에서 수학하였다”는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학교가 문을 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특히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지역의 망명 청년들은 중요한 인적 자원이었다. 개교 전인 1911년 6월 6일(음 5월 10일)부터 안동인들은 학교에 딸린 농장에서 여러 차례 콩을 심거나 모내기, 김매기를 하였다는 내용이 ‘백하일기’에는 여러 번 등장한다.

5월 10일. 조카 정식은 학교 밭에 콩을 심는 일 때문에 오후에 윤일과 함께 추가가로 떠났다. 대개 학교에 농막 하나를 사 두고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대접한다고 해서일 것이다.

5월 11일. 사위 이문형(이광민)과 정식, 윤일이 실이(實伊)와 함께 학교의 농장으로 가서 콩을 심고 비에 젖는 것을 무릅쓰고 저녁에 돌아왔다.

6월 15일. 아이(김형식)가 학교 콩밭에 가서 김을 맸다. 호미가 뭔지도 모르던 사람이 어떻게 풀을 맬지… 바로 이른바 자신의 밭을 내버려 두고 남의 밭을 김맨다고 하는 것이니, 우습고 우습다.

윤 6월 1일. 조카 정식과 손자 창로가 학교 운동장 축 쌓는 일로 도시락을 싸서 함께 가고, 집 아이는 사무 때문에 그대로 자고 돌아오지 않아, 외로운 집을 혼자 지켰다.

윤 6월 16일. 정식 조카와 손자 창로가 학교 모내기한 논에 김매러 갔다.

김대락은 아들이 자신의 밭보다 학교 밭을 먼저 일구어야 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처럼 학교 하나 세우는 일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달렸다, 자신이 공부할 학교의 축대를 직접 쌓고, 밭을 일구는 작업부터 차근차근 수행해 나갔다. 1911년 봄, 신흥무관학교의 초석을 다지는 일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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