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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광장] 기러기처럼 나아가기
[아침광장] 기러기처럼 나아가기
  •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 승인 2020년 04월 28일 16시 40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4월 29일 수요일
  • 1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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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동물들이 이야기의 소재가 될 때는 반드시 어떤(분명하고 원초적인) 교훈의 필요성이 절실할 때입니다. 그들 이야기(전설이나 우화) 속의 동물들은 다면적인 인간성을 떠나서 항상 한 가지 속성만을 대변합니다. 그들이 비유하는 것은 사회생활 속에서 인간이 드러내는 성격, 비중, 역할, 효용들에 관한 것입니다. 여우는 교활한 마음을, 돼지나 곰은 욕심 많고 미련한 속내를, 용이나 호랑이는 걸출한 재능을, 전갈이나 독사는 악한 성격을, 개나 닭은 하찮은 역할을, 새나 물고기는 머리가 나쁜 존재를 드러낼 때 주로 사용됩니다. 특히 체구가 작은 벼룩이나 개미 같은 곤충들은 가장 하찮은 인간을 비유할 때 종종 사용됩니다.

옛날부터 사용되는 몇 가지 동물 비유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용이 개천에 내려오면 새우가 놀리고, 호랑이가 저잣거리에 내려오면 개들이 짖는다.”, “개와 닭이 집을 나가면 공들여 찾으면서 자신의 마음이 집을 나가면 찾지 않는다.”,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를 주랴?”, ‘여우 같은 년’, ‘돼지 같은 놈’,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X놈이 번다.”와 같은 것들이 금방 떠오릅니다. 용과 호랑이를 제외하면 대개의 경우 인간의 좋지 않은 속성을 비유합니다. 그렇지만 신화나 종족기원설화와 같은 사회역사적인 맥락을 중시하는 이야기 속에서는 동물들이 긍정적이고 순기능적인 역할을 주로 떠맡습니다. 인간(종족)의 탄생에 기여하는 성스러운 존재가 될 때가 많습니다. 토템의 표상이 되거나 성숙한 변화의 주체가 됩니다. 우리 단군신화의 곰할머니(웅녀)가 대표적입니다. 인간의 조상(웅녀)이나 양육자(로마 건국신화의 늑대)가 되기도 하고 특별한 하늘의 은사를 입어 인간으로 변해 맹활약을 하기도 합니다(우렁각시). 부정적이든(반면교사) 긍정적이든(모범사례) 동물 비유법은 인류의 오래된 패다고지(교육적 수단) 중의 하나입니다.

주역(周易)에서 동물 비유가 스토리텔링의 중심이 되는 것은 쉰세 번째 괘인 ‘풍산점’(風山漸), 점괘(漸卦)에서입니다. 주역 64괘 중, 육효(六爻)의 효사가 전부 한 동물의 행색과 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이 점괘 하나뿐인 것 같습니다. 점괘(漸卦)에서는 기러기 동물 비유를 통해 ‘적절히 나아가는 것의 이로움’을 강조합니다. 기러기라는 동물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성이 높은 존재를 표상합니다. 그 기러기를 내세운 육효의 설명이 ‘나아가고 들어감(자기를 지킴)’의 이치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육효의 효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초육은 기러기가 물가에 나아감이니, 소자(小子)에게 위태로워 말이 있으나 허물이 없느니라.
육이는 기러기가 반석에 나아감이라. 마시고 먹는 것이 즐거우니 길하니라.
구삼은 기러기가 산마루에 나아감이니 지아비가 가면 돌아오지 못하고 지어미가 잉태하여도 기르지 못하니 흉하니 도적을 막는 것이 이로우니라.
육사는 기러기가 나무에 나아감이니, 혹 그 가지를 얻으면 허물이 없으리라.
구오는 기러기가 언덕에 나아감이니, 지어미가 삼 년 동안 애를 잉태하지 못하나, 마침내 이기지 못하니라. 길하리라.
상구는 기러기가 하늘로 나아가, 그 깃이 의표(儀表)를 삼을 만하니, 길하니라.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요즘 못된 동물 표상을 연상시키는 비행과 망동들이 여기저기서 보입니다. 시비를 가리지 않는 어깃장, 노소 불문의 인면수심, 국론을 분열시키는 가짜뉴스 같은 것들이 특히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지금은 모두 기러기처럼 나아갈 때라는 걸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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