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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광장] 1912년 합니하(哈泥河)에서 또 한 발을 내딛다
[아침광장] 1912년 합니하(哈泥河)에서 또 한 발을 내딛다
  •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 승인 2020년 04월 30일 16시 22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5월 01일 금요일
  • 1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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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추가가의 신흥강습소에 이어, 또 하나의 학교 설립이 시작되었다. ‘신흥중학교’의 설립이었다. 추가가의 신흥강습소가 초등교육기관으로 출발했다면, 합니하의 신흥학교는 중등교육과 무관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1911년 봄 경학사 조직 당시 선언했던 5개 항 가운데 다섯 번째 항에 잘 드러나 있다. “다섯째, 기성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해 기간 장교로 삼고 애국청년을 수용해 국가의 동량 인재를 육성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때문에 학교는 외부자에게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 병농(兵農)이 가능한 너른 평지를 필요로 했다.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가 적당한 공간으로 결정되었다. 지금의 통화현 광화진(光華鎭) 광화촌(光華村)에 속한 지역으로, 지금도 ‘고려촌’으로 불리는 곳이 있다.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경신참변으로 무너질 때까지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 산실로 기능하였다. 그만큼 힘든 시기를 겪어냈던 공간이기도 하다.

‘신흥중학’ 설립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김대락은 ‘백하일기’에서 1912년 4월 5일(음 2. 18) “이동녕(李東寧)과 이철영(李喆榮)이 와서 학교 짓는 일을 대략 말해주었다.”고 하였다. 늦어도 4월 초에는 논의가 구체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어 4월 중순(음 2월 말) 무렵 학교부지가 확정되고, 5월 4일(음 3. 18) 터를 닦고 교사신축에 들어갔다. 이날 68세의 김대락도 합니하로 가서, 여러 사람과 함께 학교 영건(營建)에 참여하였다. 이때 김대락은 “강산이 밝으면서 수려하고, 지세가 평탄하고도 넓어서 정녕 유자(儒子) 학도들이 들어앉아 수양할 곳으로 합당하다. 마음이 상쾌해졌는데 이곳에 들어와 처음 느끼는 것”이라며, 자신의 느낌을 밝히기도 했다. 이는 학교 위치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신흥중학교는 공사를 시작한 지 약 75일만인 7월 20일에 낙성식을 가졌다. 낙성식을 겸하여 신흥강습소 학생들의 졸업식도 이루어졌다. 김대락은 이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모인 사람이 100여 인이고, 학생으로 졸업하는 사람이 7인이었는데 모두 상품을 받았다. 취지 연설과 축사가 있은 후에 창가와 만세를 불렀으며, 졸업자 7명이 상품을 받았는데 구경 온 수십 명이 이 광경을 보며 칭송하며 부러워했다.

1912년 9월 2일(음 7. 21)에는 학교 구회(區會)가 처음으로 열리기도 했다. 그 뒤 학교는 군사훈련을 위한 제반 시설들도 갖추어 나갔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은 “학교에는 병영사(兵營舍)가 세워졌다. 각 학년 별로 널찍한 강당과 교무실이 마련되었고, 내무반 안에는 사무실·숙직실·편집실·나팔반·식당·취사장·비품실 등이 갖추어 졌다.”고 회고하였다. 이를 갖추기까지 학교를 지켰던 사람들은 녹록지 않은 시간들을 견뎌내야 했다,

그 뒤 합니하 신흥학교는 본부가 고산자 부근의 하동(河東) 대두자로 옮겨 갈 때까지 서간도지역 독립운동의 산실로 기능하였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독립운동가에서 무명의 인사까지 수많은 청년들과 교관들이 거쳐 갔다. 특히 안동을 비롯한 경북지역 인사들의 역할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전히 ‘신흥무관학교’가 위치했던 정확한 장소를 고증해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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