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금강송과 같은 갑목(甲木)의 나라인 대한민국은 유난히 나무를 쪼갠다는 의미의 벽갑(劈甲)의 경금(庚金)의 해에 경천동지할 일이 자주 발생했다. 1910년 조선을 일본에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넘어간 경술국치(庚戌國恥)가 그렇다. 경술국치가 일어난 지 10년 만인 1920년 경신년(庚申年)은 나라 잃은 대한인들에게 매우 기쁜 승전보가 한반도에 날아왔다. 바로 독립전쟁의 금자탑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다.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사에 영원히 기록될 두 전투는 한민족의 가슴에 시원한 청량제와 같은 기쁨과 긍지를 심어주었다. 그 전투의 중심에는 홍범도라는 항일 독립군의 전설적인 지도자가 있었다.

여천 홍범도(洪範圖, 1868년 8월 27일∼1943년 10월 25일)는 음력 1868년(고종 5년)8월 27일 평남 평양에서 빈농 홍윤식(洪允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8년은 조선에서는 경복궁이 중건되고 일본은 메이지유신이 단행된 해였다. 그의 타고난 천기는 다음과 같다.

시주(모름) 일주 월주 년주  
  ①신금(辛金) 일간  ⑥임수(壬水) 상관 ⑤무토(戊土)정인   천간 
  ③미토(未土) 편인  ②술토(戌土) 정인격 ④진토(辰土)정인 지지
  정을기(丁乙己) ㉮신정무(辛丁戊) 을계무(乙癸戊) 지장간

이 사주는 찬이슬이 맺힌다는 한로(寒露)후 4일 후인 ②술토(戌土·개)월의 보석 같은 ①신금(辛金)일간으로 태어났다. 이 사주는 사주의 주체성인 ①신금(辛金)일간을 기준으로 금-수-목-화-토의 오행의 구조를 가졌는데 토의 기세가 강력하다. 타고난 격국은 월지장간 ㉮신정무(辛丁戊)에서 ⑤무토(戊土)정인이 년 간에 투출하여 정인격(正印格)을 형성했다.

정인격은 길격이지만 년 월이 진술충(辰戌沖)으로 파격이 되고 조상과 부모형제궁에 변화와 이별을 동반한다. 그 자리가 어머니에 해당하는 무토를 충(沖)하고 아버지에 해당하는 을목(乙木)을 을신충(乙辛沖)하니 모친은 태어난 지 7일 만에 돌아가시고, 부친도 9살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런 고아의 운명은 그의 조상궁인 년주에 무진(戊辰) 백호살과 부모형제궁인 월주에 임술(壬戌) 백호살이 거듭 있는 것과 관련이 깊다. 백호살은 요즈음은 해당하는 육친이 교통사고, 수술, 기타사고로 인한 피를 본다는 살이다. 또한 배우자궁인 일지 ③미토(未土) 편인이 월지 ②술토(戌土) 정인과 술미형(戌未刑)으로 인하여 배우자궁이 불리하게 작용한다.

그의 첫 아내는 머슴살이와 감영의 나팔수를 청산하고 금강산 신계사에서 승려 생활 중 만난 비구니 단양 이씨(?~1908)였다. 일제는 을미의병과 정미의병장으로 활약한 홍범도 장군의 아내 단양 이씨를 회유하고자 했으나 그녀가 거절해 결국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단양 이씨는 옥사한다. 홍범도 장군의 위대성은 아내와 두 아들을 조국해방을 위한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이고 독립전쟁에 헌납하였다는 점이다. 큰아들 의병 홍양순은 정평 바배기전투에서 전사한다. 그의 두 번째 아내는 1929년에 만난 이인복이다.

그의 사주를 빛나게 하는 것은 태어난 달의 천간(월간)에 있는 ⑥임수(壬水)상관(傷官)으로 소위 용기와 지혜를 겸비한 금수쌍청(金水雙淸)에 흙 묻은 보석을 씻어내어 빛나게 한다는 도세주옥(陶洗珠玉)이다. 그의 활약은 1907년 후치령 전투이후 열 달 동안 무려 60여 회의 일본군과의 전투를 벌였다. 이때부터 ‘날으는(나는) 홍범도’,‘축지법을 쓰는 신출귀몰의 의병장’으로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는 사후에 ‘조선최고의 스나이퍼’로서의 평가를 받을 만큼 최고의 명사수였다. 1908년 이후 만주를 거쳐 1909년 연해주로 이주한 후 유인석의 13도 의군과 최재형의 권업회와 노인회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1920년 6월 7일 벌어진 봉오동(지린성 허룽현 펑우동)전투에서 대한독립군 사령관으로 홍범도의 비범한 능력은 크게 발휘되었다. 봉오동전투는 대한독립군의 홍범도가 최진동, 안무등과 대한북로독군부의 연합군대를 결성하여 일본 정규군 대대에 승리한 전투였다.

이후 홍범도는 대한독립군·국민회군·신민단 등의 연합부대병력 약1,400명을 이끌고 김좌진·나중소·이범석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합류하여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간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활약한다. 청산리대첩이 벌어진 기간을 포함하여 1920년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한국인은 3,469명이었다. 이 사변이 바로 경신참변(庚申慘變)이다. 1920년 경신년은 우리에게는 희비가 교차되 던 시기였다.

홍범도는 이후 독립군 내 공산당 파벌 싸움으로 독립군이 해산당한 1921년의 자유시(알렉셰프스크)참변을 목격하게 된다. 이후 소련에 안착한 그는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되어 이곳에서 극장 수위 등으로 일하다가 1943년 10월 25일 76세로 사망하였다. 홍범도의 묘지는 지금도 크즐오르다 공동 묘지에 있으며, 지금은 크즐오르다에 홍범도 거리가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020년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국내로 모셔올 예정이다. 해군 잠수함인 홍범도호는 한반도를 굳건히 지키면서 그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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