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둘러싼 세빌랴와 바르셀로나 거리를 지나며 승리의 행진을 하는 동안 값지고도 진귀한 수많은 물건을 보여주었다. 그때까지 몰랐던 붉은빛의 피부를 가진 사람, 한 번도 보지 못한 동물, 소리 질러대는 오색 앵무새, 느릿느릿한 동물 맥, 진귀한 식물과 과일-얼마 뒤에는 유럽에서도 수확될 것들- 옥수수, 담배, 코코넛 등이었다. 환호하는 군중은 이 모든 것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독일 문학계의 거장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년)가 쓴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 나오는 콜럼버스가 1492년 제1차 항해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왔을 때의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다.

콜럼버스는 당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인도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콜럼버스는 남북 아메리카 사이의 서인도제도에 도착한 이후 1504년 스페인으로 돌아올 때까지 카리브해 일대에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콜럼버스는 이 지역들을 ‘히스파니올라’라 부르고 스스로 총독에 등극했다. 총독이 된 콜럼버스는 스페인에서 진 빚을 갚기 위해 원주민들로부터 귀금속을 수탈했다. 원주민들을 강제로 잡아와 사탕수수밭에서 노역을 시키는 등 노예로 부리는가 하면 원주민 여성들을 납치해 매춘을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아시아의 원주민들은 면역이 없어서 콜럼버스 탐험대가 옮긴 천연두와 콜레라로 불과 3~4년 새 약 30만 명이 죽었다. 콜럼버스는 질병 확산으로 노예로 부릴 원주민이 없어지자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수입해 노동력을 충원했다. 이것이 미 대륙에 흑인들이 처음으로 끌려온 계기가 됐다. 이후 노예해방이 선포될 때까지 1500만 명 이상의 흑인들이 미 대륙으로 강제로 끌려 와 모진 고난을 겪게 된다.

콜럼버스는 유럽인들의 탐욕과 아프리카 노동력, 그리고 아메리카의 토지가 결합한 삼각무역 구조를 만들었다. 그의 사후 400년 가까이 지속 될 흑인 노예제로 인종차별의 근원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최근 미국에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조지 플로이드’ 시위가 확산하면서 보스턴과 미네소타, 리치몬드 등에 서 있던 ‘신대륙 발견자’이자 도전정신의 상징이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동상이 시민들에 의해 내동댕이쳐져 짓밟히고 있다.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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