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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단] 묘비명
[아침시단] 묘비명
  • 니카노르 파라
  • 승인 2020년 07월 02일 15시 59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7월 03일 금요일
  • 1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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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키에,
가늘지도 두껍지도 않은 목소리를 내는,
초등학교 교사 남편과
구멍가게 양재사 부인의 맏아들은,
영양식으로 키워졌음에도
태생이 허약했다,
홀쭉한 뺨에 비해
두툼한 귓볼,
네모진 얼굴에는
겨우 뜬 눈과
몰라토 권투 선수 같은 코와
그 밑으로 아즈텍 조각상 같은 입
―아이러니와 배신의 빛이
이 모든 것을 뒤덮고 있다 ―
아주 영리하지도 완전히 멍청하지도 않은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식초와 올리브유의 혼합물,
천사와 야수가 뒤섞인 소시지!

<감상> 이런 솔직하고 담백한 묘비명을 쓴다면, 나는 큰 키에 소작농의 아들이었음에도 태생이 강건했다. 공부하려는 의욕은 강하였으나 나를 받쳐줄 물질적인 환경과 머리는 따라 주지 않았다. 하지만 착실한 근성으로 책을 손에 놓지 않아 대학교와 대학원은 졸업했다. 잘 생기지는 않았으나 경주 괘릉의 무인상과 같은 인상을 지녔다. 어머니는 내 전생을 알았던지 무인(武人)과 권력집단에 입성하는 것을 기꺼이 말렸다. 천성이 모질지 못하고 정직하여 주변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늘 손해를 본다. 된장과 포도주 사이에서, 정의와 야비함 사이에서 뒤섞이지 못하는 분별깔대기!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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