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여권발 세종시 수도천도 주장이 정국을 흔들고 있다. 수도이전론은 윤미향 사태, 오거돈 성추행 사건, 인국공 사태, 박원순 성추행 의혹사건, 부동산 실정 등으로 인하여 여권의 지지율이 크게 하락하던 시점과 맞물러 그 진성성이 의심받고 있다. 또한 취임 후 3년 2개월이나 지나 그동안 언급조차 없다가 국가 천년대계의 운명인 수도천도를 국면전환용의 이벤트식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듯이 역대 한반도를 중심으로 들어섰던 왕조들도 수많은 천도와 천도계획을 수립해왔고. 천도는 국가의 명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삼국시대를 보면 고구려는 랴오닝성 환런현(桓仁縣)에 위치한 오녀산성(졸본성)에서 유리왕 때 국내성으로, 지린성 지안현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의 천도가 있었다.

평양천도는 백제·신라를 정복하기 위한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평양천도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는 만약에 국내성에서 평양이 아닌 만주의 중심지인 선양(심양)으로의 천도가 이루어졌으면 우리나라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현재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인 위례성에서 475년 문주왕(文周王·475~477)때 충남 공주(웅진)로 천도를 단행했다. 이후 다시 6세기 성왕(聖王·523~554)때 사비성(부여)으로 천도하여 국호를 ‘남부여’라 하고, 왕권강화를 꾀했다. 무왕(武王·600~641)때 귀족세력의 재편을 통한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미륵사를 창건하고, 부여에서 익산으로의 천도를 계획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한편 신라는 통일 후 신문왕 때 달구벌(대구)로 수도이전 계획이 있었다. 경주가 국토의 한쪽에 치우친 보완책으로 지방에 5소경(원주·충주·청주·남원·김해)을 설치하여 지방의 균형발전을 도모했다. 이런 점을 착안하여 행정수도, 경제수도, 교육수도, 사법수도, 금융수도, 문화수도식으로 전국 각지에 국가의 기능을 분산시켜 균형발전을 꾀할 지혜가 필요하다. 통일신라가 한반도의 중심지인 서울로 천도했다면 신라의 운명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911년 후고구려의 궁예는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송악에서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고 태봉국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고려시대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 가장 왕성하게 발달한 시기로 초기에는 서경길지설이 유행하다가 문종 이후에는 지금의 서울인 남경길지설이 대두되었다. 광종(光宗·949~975)이 개경을 황도(皇都)로, 서경을 서도(西都)로 부르게 하여 서경을 중시하였다. 숙종 원년(1096) 김위제는 ‘도선비기(道詵秘記)’에 따라 삼경(三京)을 둘 것과 남경 천도를 주장하였다. 남경 건설의 원래 의도는 국왕의 권력 강화와 함께 상업과 무역을 일으켜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려는 것이었다.

묘청의 서경천도론은 권력투쟁 끝에 나온 천도론으로 국론이 분열된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몽고가 고려를 침입한 1231년에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1270년까지 약 40년간 유지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권중화의 말을 듣고 한양에서 계룡산으로 갑자기 도읍을 변경했다. 그러나 ‘태종의 장자방’이라 불리는 하륜(河崙·1347~1416)의 상소로 공사가 중단된다. 국사는 이렇게 잘못 결정되면 심각한 국력의 낭비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이후 도읍지는 한양과 무악 그리고 개성으로 다시 좁혀졌고, 1394년 10월 28일 백악을 주산으로 하는 한양으로 1차 천도가 결정된다. 이때 정도전이 궁궐과 도성문, 전각의 이름을 지을 때 ‘시경’과 ‘서경’ 등 중국 고전을 참고하여 왕실과 백성이 무궁하게 태평하기를 기원했다. 이름을 지음에는 오행의 방위와 오덕을 따라 작명했다.

조선왕조는 수도 천도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시기가 있었다. 바로 광해군 때였다. 술수가 이의신의 교하천도주장과 반대론자 이정귀의 논쟁은 결국 이정귀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광해군일기』에 40여 차례 교하(파주시 교하읍) 천도에 대한 논의가 거론된 것을 보면 교하 천도가 당시 정국의 주요논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개혁군주 정조는 노론 기득권층으로부터 새로운 세력이 주도하는 정치주도세력의 교체와 과감한 사회개혁의 일환으로 수원화성을 건설하여 천도를 계획했다.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하여 부산이 임시수도였다.

이와같이 우리 역사에서 천도는 지배세력 교체를 통한 왕권 강화와 국란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번 여권발 수도천도론은 유라시아 대륙을 향한 기상을 포기하게 하고, 남북통일도 대비하는 한반도의 미래전략적인 접근면에서는 맞지 않는 정책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수도천도는 국면전환용이 아닌 국가적, 국민적 이해득실을 신중하고 오랜 시간 다각도로 따져봐야 한다는 교훈을 우리의 역사 속에 나타난 천도 사례들이 보여주고 있다. 남북통일 후와 국토의 균형발전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방향의 수도천도가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질 남북통일도 고려하는 국민과 국정지도자의 혜안이 더욱 필요한 문제가 수도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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