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소절(小節)은 대의(大義)라고 보기에는 그 미치는 범위와 영향이 현격하게 작은 행동이나 신념을 가리킵니다. 이를테면 부모에 효도하거나 친구, 동행자(同行者)들과의 신의를 지키는 게 소절에 해당합니다. 민족이나 국가, 공동체를 향한 헌신이나 인간다운 삶을 선양(宣揚)하기 위한 희생은 대의에 속합니다. 요즘의 세간 의리가 대의보다는 소절에 너무 치우쳐 있다는 느낌입니다. ‘조직이나 생업(生業)에 충성하는 이’는 많아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혹은 인간의 참도리를 위해 제 한 몸을 던지는 이는 참 드뭅니다. 오죽하면 최근의 의사 파업을 두고 “노동자는 자기 목숨을 걸고 파업을 하는데 의사들은 남의 목숨을 걸고 파업을 한다”라는 말이 돌았겠습니까?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국난을 맞이해서 멸사봉공, 대의를 위해 한목숨을 기꺼이 바친 이순신 장군이 생각납니다. 그가 만약 소절에 집착했던 사람이었다면 과연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잘 살 수 있었을는지 의문입니다.

…이순신이 자신을 하옥시키고 죽음 직전까지 내몬 선조의 복직 명령을 순순히 받들고, 이미 전멸상태인 수군 재건에 혼신의 힘을 다한 근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임금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 때문만은 아니었음이 문헌에서 확인된다. 이순신은 의금부 감옥에 갇힌 이후 편견과 의심으로 가득한 선조에 대해 예전과 달리 대했다는 게 ‘난중일기’에서 엿보인다. 이순신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1596년 12월까지 매달 초하루 아니면 보름에 망궐례(望闕禮)를 거르지 않고 행해 왔고 이를 일기에 반드시 남겼다. 망궐례는 외직에 있는 신하가 새벽에 일어나 임금이 있는 궁궐 방향을 향해 절을 하는 행사였다. 일종의 충성을 다짐하는 의례였다. 그런데 이순신은 통제사로 복직한 이후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사망할 때까지 단 한 차례도 망궐례를 치렀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 전 임금의 제삿날은 일기에서 챙기면서도(‘난중일기’ 1597년 7월 1일 인종의 제삿날), 현 임금에게 충성을 다지는 행위나 기록은 한 줄도 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순신이 역심(逆心)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순신은 중국 역사서인 ‘송사(宋史)’를 읽고 “신하가 몸을 던져 임금을 섬겨야 하는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다”는 독후감을 남겼다(‘난중일기’ 1597년 10월 8일). <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상태에서 참전하고 있다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된 연후에는 외직(外職)의 관리가 주기적으로 임금을 향해 예를 올리는 ‘망궐례’를 아예 행하지 않았다는 설명입니다. 난중일기에 그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 그 근거인데 이때부터 장군은 (선조 임금과의) 소절을 끊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 대의에만 충실하려 했다고 결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부분은 영화 <명량>에서도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忠)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라는 대사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들이 “못난 군주를 의리를 다해 섬길 이유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순신 장군이 답한 말입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대의를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방면에서 자신의 기득권과 특권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세상 풍속입니다. 가진 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가지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 속물들의 세상입니다. 소위 초엘리트라 불리는, 제때 제대로 배운 자들에게마저 오직 소절(小節)만이 의리가 되는 세상에서 접하는 이순신 장군의 대의를 따르는 삶과 언행이 참 거룩하고 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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