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그 기준에 관한 장소는 계절과 날씨, 시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므로 보편적 사람들이 느끼는 감흥을 주는 장소의 시공간을 말하고 싶다.

조선시대 대구의 인물 서거정(1420~1488)은 현재의 오봉산이라 명명된 침산의 정상에 서서 해가 서쪽으로 저무는 낙조를 바라다본 것을 대구10경 중 열 번째로 꼽았다. 조선시대에는 경상감영이 위치한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나아가면 신천과 금호강이 맞닿는 곳이 있다. 흰 모래사장에 다듬잇돌이 많아 침산이라 명명했다. 소가 누운 형상의 침산에는 시인 묵객들이 올라 산수화에서 보이는 원근법인 고원법, 평원법, 심원법으로 금호강을 내려보고 팔공산과 앞산도 조망하였을 것이다. 낮은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다 하여 오봉산으로 알려진 이곳에는 여러 가지 얘기를 간직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조선 말기에 대구군수와 경상도관찰사 서리를 겸한 박중양과 관련된 사실이다.

오봉산 정상의 침산정

1906년 10월에 박중양은 대구읍성을 파괴하고 일본인에게 받은 후사금으로 침산을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이라 불릴 정도의 세도로 일제강점기 시절에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했다. 이러한 권세로 미술가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근대 서화의 대가 석재 서병오에게 연통을 넣어 문인화 병풍을 의뢰하였다. 서병오는 박중양의 친일행위를 익히 아는지라 “유명한 일본 서화가를 찾을 것이지, 나에게 청하는 것을 거절 한다”고 했다. 서병오다운 기개로 민족미술의 수묵정신을 담은 사군자 그림을 친일행위자에게 주는 것을 거부했다. 해방 후에도 박중양은 대구에 거주 하였다. 침산에 정자를 짓고 여유만만하게 살았다. 항상 흰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오봉산 주위에서 놀이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작대기를 휘둘러 박작대기 영감이라 놀림을 받았다. 1959년 사망하였고 시간이 흘렀다. 후손들에 의해 기념비는 철거되고 2007년 침산공원은 국가재산으로 환수 되었다고 한다.

가을날 중양절을 앞두고 침산에 갔다. 옛 정취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시민들의 휴식 공원이 되어있었다. 계단이 여기저기 이어지며 숲 사이 아래로 시내의 아파트와 빌딩이 보였다. 정상에는 새로운 누각인 ‘침산정’이 세워져 있었다. 현판은 대구의 서예가인 서산 권시환의 행서체로 쓰여 있다. 아래 쪽 큰 바위에는 역시 행서체로 새겨져 있다.

수자서유산진두 (水自西流山盡頭) 침만창취속청추 (砧巒蒼翠屬淸秋) 만풍하처용성급 (晩風何處?聲急) 일임사양도객수 (一任斜陽搗客愁)

노산 이은상의 번역이 바위 뒷면에 적혀있다. ‘ 물은 굽이돌고 산은 끝났는데, 침산 푸른 숲에 가을 빛 어리었네, 어디서 해 늦은 방아소리, 손의 가슴 찧는고’

정자에 올라 바라본 전경은 왜 이곳이 대구의 대표적 뷰가 보이는 장소이며 해가 저무는 낙조를 보아야 하는지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강과 산, 구름과 노을의 경치는 근대 우리지역의 초기 서양화가인 이인성과 이쾌대, 김용조의 붉은 향토의 서정적 색깔과 매칭되기도 하였다. 요즘 가을 하늘은 유별나게 푸른 쪽빛 이지만 해가 저무는 저녁에는 햇빛과 구름의 조화로움으로 매우 이채롭다. 현대미술에 있어서 색면 추상화가인 미국의 마크 로스코의 영혼을 울리는 색감도 떠올려 보나 아무리 미술가에 의한 작품도 신이 창조한 자연의 색감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10월이 가기 전 느릿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서거정이 감탄한 침산에 올라 해 지는 저녁노을과 금호강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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