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때려치우기로 했어
날 현혹시켰던 형이상학,
구원과 해탈로 미끼를 던져대던 교리들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던 모든 관념적인 것들
두 눈 똑똑히 확인할 수 없는 이 모든 것들에게
이제사 가슴 후련한 작별을 고한다
잘 가거라 / 내 청춘을 갉아먹은 버러지 같은 것들아

대신, 비누 한 장
내 사타구니의 때 벗겨주는, 기분 환하게 해주는 그를
평생 믿고 따르기로 다짐한다
집착과 갈등, 고뇌도 없이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그는
아주 쉽고 구체적으로 삶을 가르친다
살아갈수록 뒤따라오는 시커먼 오독들을
제 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씻어 내주며
사람 많은 거리 속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가게 하고
또 편히 잠들 수 있게 해주는 / 비누 한 장

나는 아침저녁으로
세면대 위 앉아있는 그에게 두 손 모아
향불 올리는 자세로 허리 굽히며 경배한다.
오 거룩한 비누, 비눗님


<감상> 죽음을 미끼로 삶을 담보 잡는 종교들, 구원을 약속하고 해탈을 보장한다. 모두 아랫도리 위의 이야기들로 가득 찬 신전에선 천사가 되고, 부처가 된다. 이 공간을 벗어난 도시 사막에선 이전투구의 현상이 벌어지는 게 현실이다. 교리는 교리대로, 나는 나대로 분리되어 이상적인 관념들이 침투될 여지가 없다. 중생들은 교리를 자신의 출세와 기복(祈福)의 수단으로 삼을 뿐, 자기 수양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차라리 정직하게 살을 내어주는 비누가 구체적이고 실재적이므로 신으로 삼고 싶어진다. 내 몸과 시커먼 오독들을 씻어주기 때문이다. 지금 예수님과 부처님이 거지차림으로 신전에 온다면 과히 제대로 대접을 받을지 의문이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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