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딱 한 마디로 요약해 주실 수 없을까요?”

한 중학교의 교사 연수회에 초빙 받아서 독서교육에 대해서 강의를 한 뒤에 교장선생님에게서 들었던 말입니다.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그럴듯한 대답을 미리 준비해 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독서를 통해 올바른 언어 사용 능력과 풍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게 한다. 나아가서 깊이 있고 균형 잡힌 사고력을 함양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정도가 독서 교육의 목표가 되는 것인데 그런 말은 강의 중에 이미 나왔던 차였습니다. 엉겁결에 “‘정신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독서다.”라는 말을 하고 나왔습니다. 독서의 목적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독서가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마련해 주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내 인생의 한 권의 책’은 성공한 명사(名士)들의 흔한 레퍼토리 중의 하나입니다. 굳이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의의와 가치를 지닌 것’이 바로 독서입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왜 사는가?”에 버금가는 질문이 “왜 읽는가?”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책 아니더라도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많이 있습니다. “좋은 경험이 좋은 인간을 만든다.”라는 말은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어려서 맺은 좋은 인간관계가 어른이 되어서도 올바른 사회생활로 인도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자연은 언제나 인간의 스승이다.”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친화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대개 선량합니다. 우리는 책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좀 더 큰 범위 안에서 ‘더불어 인간답게’ 살려면 책을 잘 만들고 책을 잘 읽어야 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서 독서의 요령을 한 번 살펴 보겠습니다. 독일 동화 『백설공주』를 두고 백설공주가 사실은 공주가 아니었다라고 주장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저 ‘새하얀 눈 아이’라고 해야 될 것을 근거 없이 ‘백설공주’라 부르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전 어디에도 공주(Prinzessin)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처럼 새하얗고, 피처럼 붉고, 창틀의 나무처럼 검은 아이’는 공주로 불리어지기보다는 독일 민족의 정령(精靈)적 존재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백설’이라고 부르는 것이 천지인(天地人) 삼재를 한 몸에 지닌 그 아이의 존재성에 더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라는 주장도 충분히 가능합니다만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독일과 우리나라는 왕조 전통이 달라서 공주라는 말의 용법도 좀 다릅니다. 서양에서는 직위를 생략하고 이름만 불러도 그 인물의 신분이 충분히 인지될 때도 많습니다. 나라 간 이야기가 전해질 때는 각 나라의 문화에 맞게 적응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옛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이중 신분을 예사로 가집니다. 춘향이가 기생이면서 기생이 아닌 것을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가 됩니다. 백설이야기도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백설’이 종교적 존재라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우리의 <심청가>도 그렇습니다. 심청이를 단순히 가난의 희생양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민중의 한을 풀어주는 큰 제사장(大祭主)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학계의 상식입니다. 칼 융이 말한 상징의 이중성과 포용성도 생각해야 합니다. 심청이와 백설공주가 그 경우가 됩니다.

전체를 놓치고 부분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은 미숙한 독서의 특징입니다. 자신에게만 의미 있고 자신에게만 보람 있는 독서는 올바른 독서가 아닙니다. 특히, 오래된 이야기들을 다룰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없는 것들’이 그것 속에는 항상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계의 비참’을 제 한 몸으로 감싸고 있는 큰 상징들은 각별하게 대해야 합니다. 심청이나 춘향이나 백설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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