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반평생 칠판을 마주하고 살았다
백묵이 칠판에서 조금씩 자신을 소멸할 때
한 시절 나의 말은 흰색이었다.
아이들은 수시로 칠판을 지우고
칠판의 흰 말들을 지우고
가끔 막대기로 툭툭 때려 지우개를 턴다
지우개에 붙어 있던 말들을 털고
마침내 말들이 가루가 되어 흩어져 가도
몇몇은 입을 막거나
못 본 척하거나
깔깔거린다
가루가 된 말들과
가루가 될 말들
저 우수수 털리는 자음과 모음

생각해 보면 칠판을 마주하고 산 세월은
참으로 아슬아슬하여
못내 잘못 쓴 받침처럼 기우뚱했다


<감상> 칠판은 짙은 초록색으로 흰 분필을 잘 받아들인다. 백묵은 어두운 세상에서 빛을 밝히는 진실한 말(言)들이기 때문이다. 그 말들이 학생들에게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휴대폰과 각종 기기에 종속된 아이들은 백묵으로 쓴 말을 듣지도 보지도 않고 비아냥거린다. 스몸비족들은 휴대폰을 교주나 스승으로 삼지, 선생님의 말은 지우개 털 듯 날려버린다. 바른 말로 인도하는 선생님에게 욕설하거나 멱살을 잡는 게 교육의 현장이다. 더 나아가 부모들은 권력의 피라미드에서 학교를 최하위층으로 보고, 갑질의 대상으로 삼은 지 오래다. 이 땅에서 칠판과 아이들 사이 백묵을 쥐고 아슬히 줄타기하는 선생님들이여! 누가 있어 이 고단한 짐을 지고 갈 수 있단 말인가.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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