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성일 행정사회부국장
곽성일 행정사회부국장

정부의 주택정책 실책(失策)으로 주택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서민은 물론 집을 마련하려는 대다수 국민에게 절망을 안겨주고 있다. 전·월세도 덩달아 서민과 중산층을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서민을 울리는 한국 사회의 전·월세 제도는 조선 시대에도 있었을 만큼 뿌리가 깊다. 퇴계 이황과 김종직 등 조선 시대 내로라하는 양반들도 집 없는 설움을 톡톡히 받았다. 이들은 지방 출신으로 벼슬살이 목적으로 서울로 와서 전·월세 생활을 한 것이다.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 조사 사료에 따르면 조선 시대 15세기에 월세 기록이 있고 화폐경제의 성장과 함께 도시가 팽창하던 18세기에 전세 기록이 나온다. ‘한양의 셋집에 동산 뜰이 비었더니(漢陽賃屋園院空)/ 해마다 울긋불긋 온갖 꽃이 피어나네(年年雜樹開繁紅). 퇴계 이황은 안동 출신이라 한양에서 집을 사기 전까지 세를 살았다. ‘퇴계선생문집’에 나온 시다.

‘성중에 있는 몇몇 집들은(城中幾屋廬)/ 다 내가 머물러 살았던 집인데(盡我居停人)/ 때로는 몰아 내쫓음을 당하여(有時被驅逐)/ 동서로 자주 떠돌아 다녔네(東西漂轉頻)’ 15세기 성리학자이며 정치가인 김종직이 기록한 ‘점필재집’에서 월세를 산 애환을 시로 썼다. 이때는 화폐가 발달하지 않아서 세입자가 쌀과 부식으로 집세를 냈다.

‘사랑채를 승지 허질에게 40냥에 세놓고 나를 내쫓으려고 한다./ 내가 치른 세전은 27냥인데 13냥을 더 받으려고 염치없이 군다.’ 18세기 정조 때 무신인 노상추의 일기다. 악덕 집주인이 보증금을 더 받으려고 현 세입자를 쫓아내려 한다는 기록이다.

양반들도 이 정도였으니 평민들은 그 고통이 어떠했을까 짐작 간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집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초적인 자산이다. 집을 마련하지 못하고 언제 거리로 내몰릴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국민이 없어지는 주택정책이 절실하다.

곽성일 행정사회부국장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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