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45명의 시인이 목소리를 모았다.
전태일이 생전에 남긴 소설 초안 중 가장 완성도 있는 원고도 부록으로 실었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노동자들이 기계처럼 쓰고 버려지는 요즈음, 불의에 맞서 투쟁한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시집이다.
‘노동조합 위원장이 임기 끝내고/짐을 싸서 이사할 때/전태일 열사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를/쓰레기 더미에서 본 적이 있다//쓰레기 대부분이/조합비로 산 국회의원들 책자들이었지만/그가 집무실 구석에 처박아놓았던/먼지가 앉은 노동조합 강령도 있었다//그가 소중히 챙겨 간 물건은 무엇일까/사용자에게서 받은 선물일까/외국에서 사 온 물건일까/가족사진일까//금배지를 달 가망이 없으니까/전태일도 노동조합 강령도 폐기처분하는 것일까/그가 외치던 단결투쟁 파업투쟁이/공허하게 들려온다’ -‘공허하게 들려온다’(공광규)
백무산 시인은 추천의 글에서 얘기한다.
‘전태일 열사의 사진이 든 액자가 쓰레기통에 버려졌다.(공광규의 시) 왜 그랬을까? 그는 왜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을까? 그동안 그의 이름 아래에서 무슨 짓들 하고 있었던 걸까? 그는 더 이상 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영광을 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는 우리에게 권력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권력이라는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없기 때문이다. 권력을 좆는 이들에게 전태일이 왜 필요할까. 필요할 때 그를 부르지만 돌아서면 초라한 그를 거두어버린다.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한 것이 노동자의 기득권이다. 가장 구역질나는 짓이 노동자의 권력 행세다. 이제 쓰레기통에 버려진 ‘강령’을 누가 다시 꺼내들까? 구겨지고 개똥이 묻은 강령을. 그 이름만으로도 완성된 강령인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펼쳐든다 시여, 오염된 광장이여, 광장마저 권력의 놀이터가 된 시대여, 시여, 그의 이름을 광야에 불러내어라. 노동자의 광장은 광야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