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극원 대구대학교 법학부 교수·전 한국헌법학회 회장
정극원 대구대학교 법학부 교수·전 한국헌법학회 회장

그제 소한이 지나자 강추위가 당도하였습니다.

추위가 겨울의 본성이니 옷깃을 여미며 대응합니다. 문득 원시림이 떠오릅니다. 원시림에는 수 만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빽빽한 나무들로 인하여 한낮에도 먹물처럼 깜깜합니다. 태고의 시간이 그랬을 것입니다. 깜깜함이 향하는 곳은 빛이 비추어 지는 곳입니다. 빛이 비추어야 어둠을 깨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시림에 수 천 년을 버틴 숱한 노거수입니다. 씨앗을 뿌려 숲을 무성하게 하고서 생을 마칩니다. 원시림의 토양이 비옥한 이유는 생을 마친 나무들이 썩어서 거름이 되어 준 까닭입니다. 나무들은 사라지면서 공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에 오는 것의 존재의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원시림에서의 법칙입니다.

홀로 서 있는 나무를 봅니다. 한 그루의 나무로는 숲을 만들지 못합니다. 그 잎사귀가 푸름을 구가하고 있을지언정, 그 굵은 가지가 성성하여 보일지언정 실상은 고독한 것입니다. 홀로 낮과 밤을 맞느라 그렇게 된 것입니다. 홀로 세찬 폭우와 풍파를 맞느라 그렇습니다. 날이 아무리 차가워도 숲을 만들어 어울려 있는 나무는 따뜻합니다. 숲은 나무들을 서로 보듬게 하여 혹한의 겨울도 견뎌 내게 합니다.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불면 먼저 바람을 맞은 나무가 전령을 보냅니다. 그러면 옆의 나무가 같이 흔들리면서 차가움에 대응을 합니다. 어둠이 아무리 깜깜하여도 숲에서의 나무들은 서로에게 빛이 됩니다. 짙은 어둠이 칠흑처럼 내리면 먼저 감지한 나무의 잎이 발광체가 됩니다. 그러면 옆의 나무가 여명처럼 밝아집니다. 나무에는 그런 공존의 내막이 존재합니다. 숲은 어우러져 함께이기에 폭염도 혹한도 가혹함이 되지 못하고 일상에 불과하게 됩니다.

어둠을 기다린 가로등입니다. 고기를 모으는 집어등입니다. 집어등은 빛을 발산하여 고기를 모으고 가로등은 빛을 산화시켜 어둠을 깨우는 것입니다. 비추는 것의 작동원리가 다른 것입니다. 어슴푸레 어둠을 깨우면서 또 태양은 떠오릅니다. 밝혀 어둠을 물리치는 순간에 제일 장엄합니다. 비추어 땅 위의 냉기를 걷어내는 순간에 거대합니다. 햇살은 더 넓게 비추기 위하여 부서져 내립니다. 햇살은 비스듬히 비추어 응달에도 골고루 따사함을 보냅니다. 마치 흘러가면서 누나의 손등을 간질여 주는 물방울 같습니다. 문득 햇살을 닮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햇살은 그 비춤으로 지상의 어둠을 다 걷어 내듯이 살면서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라도 상대를 기분 좋게 하고 용기를 북돋워 주고 싶은 것입니다. 행여 다툼이 있다면 나의 생각과 주장의 강요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세상사의 실타래를 풀고 싶은 것입니다. 지치고 힘든 그 누구에게라도 기댈 수 있도록 한쪽 어깨를 내밀고 싶습니다, 기대는 것이 매개가 된다면 반목보다는 이해가, 배척보다는 배려가, 뺄셈보다는 덧셈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응달에도 고루 빛을 내리기 위하여 경사각을 만들면서 떠오르는 겨울 태양을 보면서 그런 세상이 되기를 염원하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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