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잉글랜드 튜더(Tudor) 왕가의 헨리 8세(Henry VIII)가 국가의 종교를 바꾸어가면서 얻었던 귀한 아들 에드워드 6세(Edward VI)는 1547년에 9세의 어린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올랐다. 유럽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던 에드워드는 어렸을 때부터 두뇌가 명석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가 좋은 소년이라도 그 나이에 장난을 치고 응석을 부리는 것은 당연했고, 이에 어린 왕이 잘못을 저지를 경우 어떻게 야단을 쳐야 하는가를 두고 튜더 궁정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린 왕도 엄연한 왕이기에 에드워드의 신체에 감히 회초리를 대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에드워드가 잘못할 때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를 대신 체벌하면 왕이 친구가 혼나는 것을 보지 않기 위해서 착하게 행동할 것이라는 논리에 따라, ‘왕 대신 맞는 소년(whipping boy)’을 두는 제도가 도입되었다. 초대 ‘왕 대신 맞는 소년’으로는 아일랜드 귀족의 자제였던 바나비 피츠패트릭(Barnaby Fitzpatrick)이 낙점되었다. 에드워드 대신 신나게 매를 맞아주는 대가로 피츠패트릭은 기사 작위를 하사받았으나, 에드워드가 1553년에 조졸(早卒)하는 바람에 대규모 영지(領地)를 하사받을 기회는 놓쳤다고 한다.

1603년, 스코틀랜드 스튜어트(Stuart) 왕가의 제임스 6세(James VI)가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등극하면서 그의 아들인 찰스(Charles)는 아버지를 따라 런던으로 이주하여 잉글랜드식 왕실 교육을 받았다. 시간이 흘러 ‘왕 대신 맞는 소년’ 제도의 범주 또한 ‘왕자 대신 맞는 소년’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면서, 찰스의 가정 교사의 조카였던 윌리엄 머레이(William Murray)가 ‘찰스 왕자 대신 맞는 소년’으로 임명되었다. 머레이의 경우에는 나중에 찰스로부터 백작 작위를 하사받는 가문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자기 대신 맞는 소년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1625년에 왕으로 등극한 찰스 1세의 인생에 있어 큰 악재로 작용하였다.

영국의 17세기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에 기반하여 의회(議會)를 국왕의 ‘하수인’ 역할로 전락시키고자 했던 스튜어트 왕들과, 1215년의 대헌장(Magna Carta)에 의거하여 왕의 정치적 파트너로 인정받고자 한 의원들 간의 대립이 절정에 다다렀던 시기였다. 지배 계층 간의 극심한 분열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국왕과 의회 간에 적극적인 교류와 허심탄회한 대화가 이루어져야 했음은 두말할 필요 없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과 응보를 스스로 지지 않고 ‘대신 맞아주는 사람’에게 떠넘기는 데에 익숙했던 찰스 1세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고 정당하다는 나르시스적 생각에 빠져있었다. 이로 인해 자신의 뜻에 반하는 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으며, 자신의 의중을 다른 이들에게 피력하고 설득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측근의 뒤로 숨은 채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에 대해 설명하기를 거부하는 국왕에 대한 의회의 의심과 두려움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증폭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결국 의회와 왕 간의 물리적 충돌인 잉글랜드 내전(English Civil War)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에서 패한 찰스는 1649년 1월,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최근 엄중한 법의 집행을 통해 사회의 질서와 기강을 세워야 하는 책임을 지닌 최고위 공직자들끼리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지루한 흙탕 싸움을 목격해야만 했다. 이는 이러한 갈등과 분란을 조정하라고 선출된 최고인사권자가 ‘자신 대신 맞아주는 사람’ 뒤에 서서 오랫동안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기 때문이다. 국민이 때리는 매를 맞을 수 있는 맷집이 없는 리더는 진정으로 존경받는 리더가 될 수 없다. 새해에는 그 누구의 뒤로도 피하지 않고 숨지 않는, 정정당당하게 책임을 지는 최고권력자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