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경 포항지역위원회 위원·포항문화원 사무국장
안수경 포항지역위원회 위원·포항문화원 사무국장

포항시 북구 신광면사무소 마당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비석 한 점이 보호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국보 제264호‘영일군(현재 포항시) 냉수리 신라비’. 비는 1989년 냉수마을에서 밭갈이하던 중 주민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당시 한국 고대 사학계를 시끌벅적한 흥분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그리고 3개월의 연구와 고증 후 보물을 거치지 않고 바로 국보로 지정되었다. 특히 관련 전문가와 많은 교수님이 냉수리에 집결한 덕분에 대학생이었던 나는 연이은 한국 고대사 수업 휴강에 어린아이처럼 좋아한 기억이 떠오른다.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일까. 지금도 일 년에 한두 번은 이 비석 앞에서 강의를 하는데, 통일기 이전 신라 사회 경제사를 실감 나게 강의할 수 있는 곳이 냉수리 신라비만한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일찍이 비가 발견된 신광의 본래 이름은 동잉음현으로 경덕왕 때 명칭이 바뀌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주에서 안강 기계를 거쳐 고구려와 교류하려면 반드시 거쳤어야 할 지름길이기도 하다. 게다가 왕령이 직접 미치는 서라벌 백 리 안의 땅으로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수도권인 곳이다. 그래서일까 이곳에는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가진 냉수리 신라고분과 80여 기의 횡혈식 석실분들이 산재해 있다.

비문에는 계미년 9월 25일 일곱 왕이 함께 의논하여 교시하니, 더 이상 절거리 재산 상속에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내용의 공문서를 기록해 두었다. 여기에 새겨진 계미년이 503년임은 학계에서 확실시되는 연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울진 봉평리 신라비가 가장 오래된 비였으나 그 자리를 탈바꿈시켰다. 지금은 2009년 흥해읍 중성리에서 발견된 비석이 최고비(最古碑)로 판별되면서 그 자리를 내어주었고 제작 시기에 있어 논란은 있지만 이 두 비석은 지증왕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듯싶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 전경. 문화재청

지증왕은 지도로 지철로라고도 불렸는데 정확한 왕명은 지증마립간이다. 마립간은 신라만이 가지는 고유한 왕명으로 지증왕 때 ‘왕’으로 왕호를 바꾸었으니 마립간 임금으로는 마지막인 셈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왕은 체격이 매우 크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하는데 이는 성골 왕족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앞서 소지마립간이 뒤를 이을 후사 없이 죽음을 맞이하여 추대함으로써 왕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 64세이다. 요즘 제2의 인생은 60부터라고 하는데 이미 천오백 년 전에 실천한 것이다. 더욱이 재위 기간 15년을 지속했으니 고대사회의 평균 수명이 남자 40세인 것을 감안하면 장수한 인물로 볼 수 있다. 가히 『삼국사기』에 실린 왕의 용모가 상상된다.

업적을 살펴봤을 때 무엇보다 국호를 확정한 일을 제일 으뜸으로 꼽고 싶다. 신라는 사라, 사로, 신라 등 나라 이름이 정해지지 않아 혼용했는데, 503년 10월(음력)에 신라로 확정한다. 또한 이 해가 냉수리에 비를 세워 선대 왕부터 있어 온 분쟁을 마무리 지은 해이기도 하다. 순장을 금지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삼아 실직주(현재 삼척)에 파견했으며 우산국을 정복하고 소경(小京)을 설치했다.

흔히 신라를 천년왕국이라 말한다. 한 나라의 명맥이 천 년을 이었다는 사실은 세계사에서 로마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례가 없다. 이 왕국의 반(半)시기인 500년에 즉위한 지도로 마립간의 통치는 신라 중고기(불교식 왕명시대) 성골왕족시대의 개창과 6세기 중반 진흥왕의 삼국 주도 전성기를 이끈 초석을 놓았다. 선대왕의 노력 없이 후대의 영광이 만들어질 수 없는 역사의 교훈이다. 그리고 그 초석은 사라지지 않고 명맥을 지켜온 국보 중성리 냉수리 신라비 속에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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