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립아트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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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시간의 골목에서 네가 나를 호명하지만 나는 듣지 못한다

하늘이 마지막 고백한 빛깔로 숲은 온통 붉은색이지만 지난여름 초록이 끌고 온 길을 기억하지 못하듯

여러 개의 얼굴로 누군가 돌아오거나 돌아가거나
아니 벌써 돌아와 노란 주둥이로 햇볕 알갱이를 쪼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지금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는데
말똥거리며 나를 추억하는 물방울
퉤퉤거리며 나를 뱉어내는 풋사과

어디선가 내가 다시 태어나 걸어 다니고 있는 듯
어디선가 어제 죽은 여자의 눈빛이 반딧불이로 떠돌고 있는 듯

주위를 둘러보아도 내가 보이지 않아서
얼굴 없는 한낮
눈멀고 귀먹어서
모두 있으면서 아무도 없는 어느 봄날


<감상> 빨강은 초록을 기억하지 못하고, 네가 나를 불러도 듣지 못하는 건 다른 시간과 공간을 거쳐온 탓이다. 천 개의 태양이 공전하고, 천 개의 얼굴이 자전하고 있는 탓이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거쳐온 전생이, 다가오는 후생이 나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몇 겁의 인연으로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눈빛을 맞추고 있는 걸까. 어느 순간 내가 지워질 것이지만, 봄날에 꽃은 피어난다. 꽃이 피고 지는 일도 누군가 기억하길 바랄 것이다. 다음 생에 눈멀고 귀먹을 정도로 그리워한 내가 너를 기억하고 있을까.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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