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1485년, 잉글랜드의 왕실 가문들이었던 랭캐스터(Lancaster) 가문과 요크(York) 가문 간 무려 30년 동안 벌어진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이 사실상 막을 내렸다. 랭캐스터 가문의 승리를 견인하며 튜더(Tudor) 왕가를 창건하는 데에 성공한 헨리 7세(Henry VII)는 등극하자마자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았다. 우선 오랜 기간에 걸친 내전으로 인해 심하게 분열된 국가와 국민을 통합해야 했고, 자신의 통치를 받아들이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반대 세력을 굴복시켜야 했으며, 과세권(課稅權)이 없는 국왕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재정적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야 했다. 이에 헨리가 1486년에 요크 가문 출신의 엘리자베스(Elizabeth)와 혼인함으로써 이 두 원수(怨讎) 집안 간의 외형적이고 상징적인 통합을 이루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전국에 흩어져 있는 저항 세력을 처벌하고 막대한 개인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더 교묘하고 치밀한 방법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헨리 7세가 활용한 무기들이 바로 ‘성실청(星室廳·Court of Star Chamber)’과 ‘모튼의 포크(Morton’s Fork)’였다.

잉글랜드 왕의 당시 런던 거처인 웨스트민스터궁(Westminster Palace)내 천장에 별이 그려진 방에서 개정(開政)하였다고 하여 이름이 붙은 성실청은 원래 보통법(common law)을 적용받았던 하급법원의 판결에 대한 항소만 다루기 위해 수립되었었다. 그러나 튜더 왕가 시기에 들어서는 하급법원에서 처리하기 어려운 사건들을 직접 다룰 수 있도록 그 권한이 강화되었다. 예를 들어 평민의 귀족 고소, 부정부패, 반역(反逆) 모의 등 공개 법정에서 다투기에는 민감하고 위험한 성격의 사건들이 성실청의 관할로 넘어갔다. 문제는 성실청의 재판에 왕이 참석할 수 있었으며, 성실청의 재판관들이 다 왕의 측근들로 구성되었던 관계로 사실상 왕의 뜻대로 판결이 내려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성실청의 재판 과정이 비공개였으므로 공정성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으며, 판결에 대한 이의 제기도 불가능하였다. 결국 성실청으로 끌려간 사람은 죄의 유무를 떠나 왕이 원하는 대로 처결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즉 재판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판결은 이미 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헨리 7세는 또한 존 모튼(John Morton)이라는 측근을 캔터베리(Canterbury) 대주교 겸 재상(宰相)으로 임명하여 잉글랜드 전역의 부유한 귀족들로부터 ‘강제공채’라는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게 하였다. 모튼은 자신이 방문한 귀족의 집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우면 ‘돈이 많을 테니 이를 내놓으시오’라고 요구했고, 집이 누추하고 검소하면 ‘아껴둔 돈이 많을 테니 이를 내놓으시오’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러한 빼도 박도 못하게 하는 ‘모튼의 포크’ 논리의 활용으로 인해 귀족들은 부(富)의 유무를 떠나 모튼에게 돈을 뜯기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즉 모튼이 집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부터 갈취는 이미 행해진 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진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 이미 정해놓은 ‘결론’과 ‘정답’으로 정의(正義)가 규정되는 사회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존재할 수 없다. 기획수사를 통해 정권 충견의 역할을 자청해 온 대한민국 검찰이 많은 국민들의 지탄을 받으면서 결국 수사권을 빼앗긴 이유가 여기에 있고, 정권의 입맛에 맞는 검사들이 대거 포진할 수 있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출범이 많은 국민들의 우려와 분노를 자아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헨리 7세의 ‘정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 사회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헨리 8세(Henry VIII)라는 폭군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다. 공정이 상실되고 폭정이 난무하는 사회의 말로야말로 이미 정해져 있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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