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향기] 손기정의 청동투구
[사색의 향기] 손기정의 청동투구
  • 정극원 대구대 법학부 교수.전 한국헌법학회 회장
  • 승인 2021년 04월 07일 17시 46분
  • 지면게재일 2021년 04월 08일 목요일
  •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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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극원 대구대 법학부 교수.전 한국헌법학회 회장
정극원 대구대 법학부 교수.전 한국헌법학회 회장

마라톤 영웅 손기정(1912-2002)은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습니다. 손기정의 기록은 1947년 4월 19일 미국 보스톤 마라톤에서 서윤복이 2시간 25분 39초의 신기록을 세울 때까지 부동의 세계기록이었습니다. 손기정의 기록이 더욱 빛나는 그 이면에는 마라톤 올림픽 선발전에서 출전권 두 장을 조선인 손기정과 남승룡이 차지하자, 민족적 자존심이 꺾인 일본육상협회는 일본인 후보선수를 출전시키려는 꼼수로 현지선발전을 치르게 했고, 그 경기에서 체력 소모를 다한 극한적 상태에서 이룬 정신적 승리라는 점입니다. 시상대에 선 손기정은 월계관으로 가슴에 단 일장기를 가려 수치심을 삼켰습니다. 후일 인터뷰에서 ‘나라 없는 백성은 개와 똑같아 일장기가 올라가고 기미가요가 연주되는 것을 알았다면 난 베를린 올림픽에서 달리지 않았을 거야’라고 회한했습니다. 베를린 올림픽 기념탑에는 금메달 명단을 새겨 놓았는데, Son(손기정) 국적을 JAPAN이라 쓰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SON 옆에 JAPAN은 원래의 글씨가 아니라 새로 새긴 글씨입니다. 살아생전 손기정은 ‘내 소원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손기정으로 기억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강원도지사를 역임한 박영록 전 국회의원이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그 기념탑을 보고서 의기가 발동해 야밤에 아내와 함께 JAPAN을 지우고 SON 옆에 KOREA를 새겨 넣었습니다. 주체하지 못하는 행동하는 애국심의 발로였고 손기정의 소원을 이뤄 준 것입니다. 하도 감쪽같이 새겨 넣어서 독일도 한동안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을 안 독일이 다시 JAPAN이라 새롭게 새긴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의 것보다 좀 더 흰색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손기정은 그 소원을 풀지도 못한 채 2002년 운명했습니다. 주권을 가진 나라라면 지금이라도 외교를 통해 당당하게 수정을 관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나라의 외교의 본분이고 국민에게 긍지를 심어주는 일인 것입니다.

1900년 파리 올림픽 때부터 마라톤 우승자에게 그리스 고대유물을 부상으로 주는 관행에 따라, 우승자 손기정에게는 그리스 고대 청동투구가 부상으로 준비돼 있었습니다. 투구는 지금부터 약 2600년 전인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코린트지역에서 만든 것으로서, 1875년 독일인이 고대 올림픽이 열렸던 제우스신전에서 발굴한 어마어마한 가치의 귀한 보물이었습니다. 손기정은 이 사실을 모른 채 그냥 귀국해 버렸습니다. 독일은 이 보물 투구를 손기정에게 전달하지 않고 베를린 사로텐부르크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1975년 베를린 올림픽 제패 40주년 기념전시회 준비를 위해 사진첩을 보던 중 손기정은 드디어 청동투구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망각의 역사를 되돌리는 소름이 돋는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청동투구가 손기정에게 전달되지 않고 독일에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자 당시 독일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던 노수웅씨가 애국심의 발품을 팔아 그 존재를 찾아냈습니다. 그 후 투구반환을 위한 각계의 우여곡절의 노력 끝에 1986년 드디어 감격적으로 손기정의 품에 안기게 됐습니다. 1987년 외국유물로서는 최초로 보물 제904호로 지정됐습니다. 손기정은 1994년 이 투구를 ‘개인의 것이 아니고 민족의 것이다’라며 국가에 기증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손기정의 청동투구는 그 가치로서만 보물이 아니라 그 정신에 있어서도 진정한 민족의 보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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