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인생은 어느 나이에나 살만하다. 인생을 즐기기에 좀 늦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지만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의 생각이다. 인생의 오후는 숙제 없는 방과후(放課後)와 같다. 느긋하게 쉴 수 있다. 부귀와 명예, 그리고 바라는 모든 것을 얻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만이 삶의 의미요, 행복은 아니다. 그것이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자존심을 지켜주기도 하지만 물거품 같은 것일 수 있다. 교활과 낭패와 유예의 세상사를 다 겪은 뒤 내려놓거나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도 인생의 즐거움이다.

지금 목전에 선거 바람이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지나갔다. 대선에 이어 지방선거 바람이 뜨거웠다. 선거가 민주주의 꽃이라는데 꽃 치고는 별로다. 잘난 사람들이 자신이라야 지방 경제와 문화를 살릴 수 있다고 목이 잠기도록 외치고 다녔다. 당의 공천자와 무소속이 엉켜 자신이 올바른 일꾼이라고 목 놓아 외쳤다. 자신에 대한 PR이 아니라 상대 후보의 비방이 난무했다.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라 너그럽게 보아넘겼다. 하지만 교육을 책임질 교육감 후보로 나선 분들에게서도 이런 면이 보여 안타까웠다.

중국 문헌 ‘산해경’에 “교(狡)”라는 짐승의 그림이 있는데, 개도 아니고 표범도 아니고 소도 아닌 정체 모를 짐승이다. 교가 나타나면 풍년이 든다는데 나타날 듯이 애를 태우고 나타나지 않는다. 결코 좋은 짐승은 아니다. “활(猾)”이란 짐승도 있다. 사람의 몸뚱이에 돼지의 털이 나 있고 동굴 속에 사는데 이놈이 나타나면 천하가 온통 대란에 빠지고 만다. 활(猾)은 뼈가 없어 호랑이를 만나도 몸을 웅크리어 씹히지 않고 호랑이 배속에 들어가 도로 내장을 파먹는다. 이 두 짐승을 합하여 ‘교활(狡猾)’이라 한다.

산해경에는 낭(狼)과 패(狽)라는 짐승도 나온다. 낭(狼)은 태어날 때부터 뒷다리 두 개가 없거나 아주 짧다. 패(狽)는 앞다리 두 개가 없거나 아주 짧다. 그래서 두 녀석이 힘을 합쳐야 제대로 걸을 수 있다. 엇박자가 되면 넘어지기 일쑤다. 낭(狼)은 겁을 내지 않고 공격을 하지만 지모(智謀)가 부족하고, 패(狽)는 순하고 겁이 많긴 하지만 지모(智謀)가 뛰어나다. 그래서 함께 먹이를 찾으러 갈 때 패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마음이 맞지 않아 서로 고집을 피우면 움직일 수가 없다.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낭패(狼狽)가 된다. 어떤 일을 도모했을 때 잘 풀리지 않아 처지가 고약하게 되는 경우가 낭패(狼狽)다. 세상사에 낭패를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같은 편끼리 마음이 맞지 않거나 행동이 엇갈리어 일을 망치는 것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부족하다. 부족한 면을 보완하지 못하고 한쪽에 치우치면 낭패가 된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유예(猶豫)라는 동물도 나온다. 유(猶)는 원숭이처럼 생겼고, 예(豫)는 코끼리처럼 생겼는데 둘 다 어찌나 의심도 많고 겁도 많은지 유(猶)는 작은 소리만 나도 깜짝 놀라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고, 소리가 나지 않아도 차마 내려오지 못하고 매달려 있거나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한다. 예(豫)도 마찬가지로 앞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다. 이런 유와 예가 함께하는 모습을 본다면 성질 급한 사람은 속 터질 지경이 된다. 기소유예(起訴猶豫)나 선고유예 같은 법률용어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대선과 지방선거를 한 발짝 물러앉아 바라보니 교활도 보이고, 낭패도 보이고 유예도 보였다. 기원전 3∼4세기에 이미 상상의 동물을 통해 풍자한 세상을 민주주의 꽃이라는 선거를 통해 다시 확인하고 쓴웃음으로 즐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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