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2022년 6월 30일∼7월 1일에 실시한 ‘2022 경북문화포럼’에 참석했다. 10년째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고, 역사문화자원의 발굴과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는 행사다. 이번은 ‘화랑의 혼이 깃든 단석산에서 신라의 정기를 품다’라는 주제였다. 나의 관심사는 단석산에 화랑의 혼이 얼마나 깃들었을까? 깃들었다면 그 흔적이 무엇이며, 어떻게 계승하고 현대화할 수 있을까에 있었다. 오랫동안 화랑정신의 계승에 관심을 기울여 왔기 때문이다.

기조 강연에서 단석산을 역사성이 쌓인 명산의 하나로 들면서도 왜곡된 부분을 지적했다. 단석산이 관심의 표적이 된 요인을 서쪽 중턱의 신선사(神仙寺)로 보고, 이곳이 화랑 김유신의 수도처요, 산의 이름도 김유신과 관련된 것으로 잘못 단정하여 굳어진 것이라 했다. 오히려 동쪽 평지에 사람들이 뒤편의 우뚝한 산을 진산(鎭山)이라 여김으로써 역사성이 깃들었다는 것이다. 김유신이 이 산에 들어와 수련한 사실 자체는 인정하지만 영험한 보검이나 단석(斷石)의 이야기는 조작 행위라고 지적했다.

김유신이 이끄는 용화 향도가 단석산에서 수련한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미륵불상을 보아도 용화를 내세운 화랑도 조직에 어울리는 곳이며, 오봉산과 더불어 군사적 요충지이므로 화랑의 지도자가 숙지해야 할 곳이라고 했다. 산의 이름도 훼황산, 미황산에서 나중에 단석산으로 바뀐 것으로 보고 있었다.

발제 발표에서 공통적으로 단석산의 명칭이 ‘월생산’, ‘달내산’이었다고 단정했다. 불상으로는 신선사 마애불상군과 질매골 석불좌상, 화천리 석불좌상을 꼽았다. 마애불상군이 위치해 있는 단석산의 신선사가 김유신을 비롯한 화랑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는 점에서 통일을 염원하고 미륵 정토를 구현하려고 했던 신라의 유적이지만 산맥과 지맥의 영향으로 외세로부터 안전한 곳이고, 수렵채취 활동이 쉬운 환경이어서 선사시대 사람들의 정주 생활이 이루어져 정치체가 발달한 곳이라고 했다. 또 ‘신선사’의 ‘신선’은 화랑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단석산은 산악제사의 제장(祭場)이었고, 산악신앙이 불교 사찰로 옷을 바꿔입은 곳으로 해석했다. 무·불(巫佛)교대의 과정이라 했다.

포럼의 주안점은 ‘단석산에서 신라의 정기를 품다’이다. 단석산이 모량부의 진산 역할, 산악제사의 제장에서 김유신을 비롯한 신라 화랑들의 수련 장소였다. 시대가 바뀌면서 화랑이나 김유신과 더 밀접하게 결합하였다. 왜곡된 면이 있다 해도 후세 사람들이 단석산과 화랑을 연결하고 김유신의 명검이나 병법을 신선과 결부시켰다. 이는 화랑이나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에 대한 기대가 컸던 탓이다. 김유신의 칼이 바위를 베는 행위의 진실성과는 별개로 김유신과 화랑을 영웅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쌓인 것이다. 여기에 신선 사상과 미래 지향적인 미륵 사상이 결부되었다.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사료를 바탕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보다 더 많이 화랑과 김유신이 단석산과 결부되고, 산의 명칭이 단석산으로 굳어졌다. 왜곡해 가면서도 신선과 김유신, 화랑을 미화시켰다. 단순히 김유신이나 화랑들이 들어와 수련한 곳이라는 정도로는 해석이 안 된다. 신라에서 고려, 조선으로 내려오면서 단석산에 김유신과 화랑, 신선, 영험한 칼, 병법 등을 더 깊이 연루시킨 까닭이 어디에 있었을까? 신라 이후 반도의 한쪽으로 소외된 소실 감을 회복하고, 몽골 침입, 임진왜란 등 외침에서 받은 수모의 보상 심리일 것이다. 서라벌의 자존심이요, 민족의 자존심이요, 단석산에 얽힌 지켜져야 할 민족혼의 흐름일 것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