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신하(臣下)의 술을 임금님께 드릴 수 없다. 고려 성종 때 외교적 담판으로 전쟁을 막고 국토를 지킨 불세출의 외교가 서희(徐熙) 선생이 남긴 일화다. 서희가 머무르는 진영의 막사에 성종 임금이 들어가려 하자, 서희는 신하의 막사는 임금께서 오실 곳이 아니라고 하면서 막았다고 한다. 또 성종이 서희에게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술을 내어오라 하니, 신하의 술을 임금께 드릴 수는 없다고 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막사 밖에 앉아서 성종 임금의 어주로 술을 마셨다는 일화가 신지주 불감헌야(臣之酒 不堪獻也)다.

임금과 신하가 공개되지 않은 곳에서 만나는 일이 많으면 음모를 꾸미게 되거나 이상한 소문이 돌 위험이 있다. 온갖 억측이 나돌 수 있다. 또 신하가 임금에게 술을 올리면 뇌물이 되는 수도 있고, 잘못되었을 때는 독을 탔다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의심받을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일임을 일깨워주는 이야기가 된다. 뇌물이 아니더라도 뇌물 비슷하게 느껴질 가능성이 있다면 비록 작은 것, 술 한 잔이라도 공직자 사이에서 주고받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김영란법과 비슷한 법을 1000년 전의 서희 선생이 실천한 셈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임금이 너무 누추한 곳에 오거나, 신하의 귀하지 않은 술을 임금이 받아들여 임금의 권위를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사소한 일에도 격식과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 당시 사정으로 본다면 후자가 더 가까울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일화를 봐도 확실히 서희 선생은 사리 판단 능력이 뛰어난 분이다. 이 해에 있었던 전쟁은 수십 년간 긴 평화 시대를 보낸 고려 조정이 갑자기 전쟁을 겪는 바람에 굉장히 겁을 먹고 있었다. 거란의 소손녕이 팔십만 대군을 몰고 온 전쟁이라 감당하기 버거웠다. 그런 위기에서 서희의 담판, 협상으로 기발하게 해결하고 평화를 찾았으니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 전쟁을 흔히 ‘거란의 1차 침입’이나 ‘1차 여요전쟁’이라고 하며, 조선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 ‘고려사절요’에는 993년이 계사년이어서 ‘계사지역(癸巳之役)’이라 부른다. 서희 선생이 이 협상을 위해 거란 군사 진영에서 머문 기간은 총 7일. 협상 결과로 전쟁은 멈추고 거란 군사는 돌아갔다. 고려는 강동 6주를 차지하고 그 지역의 길을 이용하여 거란과 교류하며, 고려가 거란 임금에게 예의를 표시한다는 것이었다. 강동 6주가 고구려 땅이었고, 그 고구려를 이은 나라가 고려임을 강조하여 얻은 결과라 한다.

서희 선생이 협상을 얼마나 잘했는지, 협상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적(敵)이었던 거란의 소손녕이 낙타 10마리, 말 100마리, 양 1000마리, 금기(錦綺), 나환(羅紈)이라고 하는 비단 500필을 선물로 주기까지 했다. 소손녕이 서희와 함께 즐겁게 잔치를 열었다는 기록도 있다.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던 전쟁 상대방에게 협상 후에는 선물을 잔뜩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80만 대군으로 고려를 정복할 테니 강가에 나와서 항복하라고 했던 소손녕이다. 무엇으로 이들의 태도를 바꿔 놓았을까? 서희 선생의 외교적 능력이요, 사리 분별력이요, 정당성이다. 임금이 막사에까지 찾아왔지만 올바른 사리 판단으로 감히 모시지 않았다. 임금이 술을 달라고 청했는데도 신하가 술을 함부로 올릴 수 없음을 간하고 감히 거절했다. 시끄러운 정가 소식에 생각난 ‘신지주 불감헌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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