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서 필요한 산림자원을 보호 육성하기 위해 지정하는 산을 봉산(封山), 또는 금산(禁山)이라 하고, 설치한 지정 표석을 봉표라 했다. 왕실의 관재(棺材)나 건축재(금강송)를 위하여 지정한 것과 왕실의 제(祭)를 위해 향불을 피우는 숯을 위한 것, 다시 말해 제수 경비 마련을 위한 것이 있다. 민초들의 생활에는 많은 어려움을 준 제도다.

경주 문무대왕면에 ‘불령봉표’, ‘시령봉표’, 양남면에 ‘수렴포봉표’가 있다.

불영봉표는 왕의 길 중간 ‘부처 고개’에 있고, 시령봉표는 기림사에서 장기로 넘어가는 감골에 있다. 수렴포봉표는 양남 수렴리 31번 도로 옆 텃밭 안에 있다. 수렴포봉표는 봉산을 할 만한 산이 보이지 않아 의아하지만 세 곳 모두가 연경묘향탄산인계하불령, 시령, 수렴포봉표(延慶墓香炭山因啓下佛嶺封標)라 새겨져 있다. 모두 연경묘 제사에 향불 피우는데 쓸 숯을 만들기 위한 산이므로 임금의 명에 의해 불령(시령, 수렴포)에 출입을 금한다는 것이다.

연경묘는 조선 제23대 순조의 장남 효명세자의 묘호다. 효명세자는 3세에 왕세자에 책봉, 18세에 대리청정할 정도로 영명했다. 효명세자는 정체된 조선의 현실과 부조리로 얼룩진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다. 북학파의 태두였던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교류하면서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패악과 유교 근본주의에 함몰된 선비들의 아집을 버리게 하고, 문화선진국인 청나라를 외면하는 국수주의적 태도를 바로잡으려 했다. 단숨에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기에 청사진을 그려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그 구상의 공간으로 창덕궁 후원에 기오헌과 의두합을 지었다.

순조 27년에 대리청정을 명 받는다. 정사를 맡게 된 세자는 부조리한 현실을 적극적으로 개선해 나간다. 안동김씨 일파의 세도정치에 제동을 걸고, 비리관리를 축출하였다. 세도 가문의 등용문으로 변질된 과거제도를 고쳐 50여 차례의 과거 실시로 새로운 인재를 모았다.

진찬연을 통해 왕권 신장을 노렸다. 부왕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자경전진작정례의’, 모후 순원왕후 생일을 기념하는 ‘무자진작의’, 순조 등극 30년을 기념하는 ‘기축진찬의’ 등 연회를 통해 국왕의 위엄과 권위를 높였다.

대리청정 3년째 군신 간의 질서가 잡혀가고 있었지만, 전국을 휩쓴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발목을 잡았다. 위기를 느낀 세자는 백성들의 구호에 전념했다.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지방 수령의 비리를 색출하여 바로잡았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도 정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대리청정 3년 동안 세상이 바로 서지 못했다고 충고하는 글이 올라왔다. 탕평책도 비판을 받았다. 안동김씨의 반발이다. 효명세자의 국정 수행능력이 부족하다고 맞서게 된다. 세자와 세도 정권 사이에 일대 결전이 불가피하게 된다.

양측 긴장감이 고조되던 이 시점에 세자가 갑자기 죽음을 맞는다. 개혁의 원대한 포부도 깨끗이 사라지고 만다. 효명세자의 부음을 들은 박규수는 충격을 받아 자신의 호에서 ‘굳셀 환(桓)자’를 ‘입 다물 환(환)자’로 바꾸고, 20여 년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효명세자의 제사를 위해 지정했다는 봉표였다. 세도정치에 의한 무분별한 봉표 시행으로 폐단이 심했다. 세상 바로잡기에 힘을 쏟다가 죽은 효명세자의 뜻이 아니다. 백성 편 가르기에 여념 없었던 사람들의 짓이다. 지금은 민초들을 괴롭히는 제도가 없는가. 살펴서 바로잡을 일이다. 오늘은 경주부윤 노영경의 비(碑)라도 찾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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