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립아트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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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라면
지하철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바지에 커피를 쏟지 않았더라면
승강기 문을 급하게 닫지 않았더라면

내가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채우기보다 비우기를 좋아했다면
대화보다 침묵을 좋아했다면
국어사전보다 그림책을 좋아했다면
새벽보다 아침을 더 좋아했다면

무작정 외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날 그 시각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
너를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 말을 끝끝내 꺼내지 않았더라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닦아 주는 데 익숙했다면
뒤를 돌아보는 것보다 앞을 내다보는 데 능숙했다면
만약으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하루하루를 열고 닫지 않았다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햇빛이 들고
바람이 불고
읽다 만 책이 내 옆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만약 내가
어젯밤에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감상> 사주 명리를 공부하면서 하나 배운 게 있다. 세상만사 병(病)이 있으면, 약(藥)도 있다는 것. 약 중에는 ‘만약’이라는 약도 있다.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시를 쓰지 않았다면, 그날 거기 가지 않았다면,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까? ‘만약’은 후회의 약이다. 후회란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다. 삶이란 결국 뉘우치며 나아가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에 발목 잡힌 사람은 불행하다. 현존(現存)하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결코 같은 시공간에서 살지 않는다. 세상은 ‘층층만층구만층’이 분명하다. <시인 김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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