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얼굴 생긴 모습을 두고 ‘고양이과(科)’니 ‘강아지과’니 하는 말들을 자주 듣습니다. 최근에는 ‘공룡과’도 생겼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과거의 ‘여우’와 ‘곰’이라는 대표 동물상징 대신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런 말들이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짐작입니다만, 얼굴은 ‘고양이과’로 생기고 하는 짓은 ‘여우’ 비슷하면 인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남녀불문입니다. 젊어서는 특히 더 외모에 치중합니다. 그때가 제일 빛날 때거든요. 겉보다 속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려면 이런저런 산전수전을 겪어봐야 합니다. ‘1. 건강 2. 성품 3. 의리’라는 걸 알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렇다고 외모가 전혀 의미가 없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내용과 틀은 항상 상호 텍스트적입니다. 살다 보면 어디서든 내용을 규정짓는 틀들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이 대표적인 ‘틀의 존재’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결국 우리가 말하는 삶의 내용이라는 것도 그 틀이 찍어내는 결과물일 때가 많습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일차적인 틀은 외모와 지능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거기서 인간의 우열이 최초로 판가름납니다. 타고나는 것이니 기타 노력이나 대물림으로 얻는 것들보다 훨씬 높은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막스 베버는 세상의 카리스마 중 가장 권위 있는 것이 물려받은 카리스마라고 했습니다만(왕권 같은 것이 거기에 해당됩니다), 인간의 외모는 거의 왕권 수준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래로 남녀노소 불문하고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평가)이 “당신은 예쁘다(멋지다)”입니다. “능력 있다”, “돈 많다”, “운동 잘한다.”, “공부 잘한다”와 같은 찬사보다 “당신 섹시하다”, “나이 들수록 멋지다”, “입는 옷마다 잘 어울린다”와 같은 찬사가 훨씬 윗줄에 속하는 말입니다. 일찍이 그리스 신화에서도 그런 이치를 확인한 바가 있습니다. 경쟁적 관계에 있는 세 여신들 중에서 미(美)를 주겠다는 아프로디테에게 판정관 패리스의 사과가 던져진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권력도 지혜도 명예도 부도 모두 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패리스의 사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침광장>, 2016.7.5. ‘틀의 미학’ 참조)

미를 추구하는 예술에서는 틀이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틀 없이는 그 어떤 창조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술적 텍스트에서 틀이 지니는 중요성은 우리가 서사물의 ‘거짓 결말’들을 생각해 보면 분명해진다. 보통 헤피 엔딩의 영화에서는 두 연인이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을 때 포옹을 하는 장면에 의해 ‘거짓 결말’의 효과가 드러난다. 행복한 결말을 나타내는 ‘행위의 중지’를 그것은 나타낸다. 그렇게 틀의 기능을 획득하는 것이다. 작품을 완결 짓는 틀 중의 대표적인 것이 시간의 완전한 정지다. 보통 이야기들은 성공(적인 귀환), 결혼, 죽음, 번영, 축제 등 더 이상 나올 사건이 없다고 하는 진술과 더불어 끝을 맺는다. 이야기의 마지막 성공(번영)은 ‘시간의 끝’이다.”(보리스 우스펜스키, ‘작문의 시학’에서) 이야기 속의 갈등이 마무리되고 행동이 완료되면 이제 ‘끝을 만드는 틀’이 등장합니다. 포옹이나 성공이나 죽음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시간의 정지’가 초래되고, 작품은 자연스럽게 ‘완결’의 구조를 성취합니다. 그런 ‘거짓 결말’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예술’로 편입될 수 없다는 게 이론가들의 설명입니다. 다시 우리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결국 자기가 어떤 틀 속에 들어가 사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밝은 곳, 어두운 곳, 조용한 곳, 시끄러운 곳, 편안한 곳, 불편한 곳, 모여 사는 곳, 뿔뿔이 흩어져 사는 곳, 존엄을 가지고 사는 곳, 비굴하게 사는 곳, 우리가 처하는 그 모든 공간이 우리 인생의 틀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우리가 어떤 틀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또 하나, 그 틀이 어떤 수준의 그럴듯한 ‘거짓 결말’을 가지고 있는가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이 결국 내 인생의 완성도를, 아름다운 결말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끝이 좋아야 다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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