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정채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사망자가 1명 더 늘어났다. 다수가 모인 군중 속에 꽉 끼어 옴짝달싹 못 했던 경험이 이전에도 있었고 해외의 뉴스 보도에서 이따금 압사 사고를 들어본 적은 있지만, 사람들이 우르르 몰리는 상황(stampede)이 이렇게 무서운 일인지는 상상도 못 했다. 필자 역시 가끔 방문했던 익숙한 골목에서 이토록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는 현실을 아직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태원 참사 그 자체도 8년 전의 세월호를 다시금 떠올리게 할 만큼 트라우마틱하지만, 이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그 못지않은 충격을 주었다. “특별히 우려할 만큼 인파가 모인 것은 아니었다.” “경찰·소방인력 배치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를 마친 후 이어진 브리핑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한 발언들이다. 해당 발언에 대해 정치권과 언론에서 책임 회피라는 비판이 이어졌고 이후 해명 및 사과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위의 발언들이 특히 민사책임을 다투는 소송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진다. 행안부 장관의 프로필을 들여다보았다. 역시 법조인 출신이다.

위의 발언들은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하는 국민을 마치 국가배상을 청구하는 잠재적 원고로 상정하고, 피고인 국가의 소송대리인이 하는 변론과도 같다. 엄청난 참사를 마주하고 국민이 당연히 물을 수 있는, 그리고 물어야 하는 질문은 ‘국가의 책임은 무엇인가’이다. 이에 대해 매년 있었던 핼러윈 축제와 비교해 참가 인원수의 특이성이 없었고, 경찰 인력을 충분히 배치했다고 답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예측불가능한 사고였기에 국가의 주의의무 위반, 즉 과실이 있다고 볼 수 없고, 국가의 행정작용과 해당 사고 사이의 인과관계 역시 입증되기 어렵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렇듯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을 연상시켜서인지, 희생자의 신원확인이 채 완료되기도 전인 사고 바로 다음 날 장례비와 치료비 지원 계획을 밝힌 정부의 대책마저도 마치 피고가 제시하는 합의안 같이 느껴진다.

책임(責任)이라는 말은 다층적으로 쓰인다. 위법한 행동을 한 사람에 대한 민·형사적 책임만이 아니라 맡아서 해야 하는 임무, 그리고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해지는 의무와 부담을 의미하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자기 관리·감독의 권한 안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책임을 수인(受忍)하는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다.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공직에 있는 이들은 객관적으로 법적 책임이 귀속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권한이 미치는 관할 안에 발생한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고 ‘옷을 벗는’ 선택을 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연예인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잘 알려진 인플루언서들도 부정적인 이슈로 세간의 주목을 받을 때,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상당 기간 자숙의 시간을 갖기도 하는데, 되려 이들이 더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정치가 실종되고 법이 그 공백을 가득 메운 지금의 시점에서 어느 새부터인가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행동을 (유죄의 입증을 한결 수월하게 하는) 피고인의 자백인 것 같이 정부가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대한민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오늘 기준 156명이 사망하였다. 운집 인원을 얼마로 예측했는지, 성희롱, 몰카 및 마약범죄 단속에만 집중된 경찰의 인력 배치는 적절했는지, 지하철의 무정차 통과나 차 없는 거리는 왜 실시하지 않았는지 등 수많은 쟁점이 제기되고 있지만, 그 시시비비와 무관하게 ‘지금의 상황 그 자체’만으로 정부는 마땅히 국민 앞에 즉각적으로 사죄하고 응당한 법적,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 핼러윈 축제의 주최자가 존재하지 않았고 현재 경찰 권한으로 선제적 대응이 어렵다는 것 역시 변명의 사유가 될 수 없다. 그러한 경우 자동적으로 디폴트(default) 책임은 국가에 있는 것이고, 이는 헌법과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등> 법률 곳곳에서 법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또한 <경찰관 직무집행법>상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의 보호와 공공의 안녕과 질서 유지는 경찰관의 직무 범위 안에 있고(제2조), 극도의 혼잡, 그 밖의 위험한 사태가 있을 때는 위험 발생의 방지를 위한 조치를 할 수 있다(제5조). 국민의 생명 및 신체의 안전과 재산 보호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기본적 의무임은 굳이 법조문을 통해 확인하지 않더라도 일반적 ‘상식’ 아닌가.

국민에 대한 정부의 지나친 방어적 태도는 재난을 통한 배움, 그리고 개선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국가애도기간의 선포는 국가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묻는 목소리의 침묵을 요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분들께 애도의 마음을, 치료와 치유의 과정에 계신 분들께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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