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섭 대구한의대학교 미래라이프융합대학장
김문섭 대구한의대학교 미래라이프융합대학장

지난 11월 9일은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지 33년이 된 날이다. 1989년, 당시 서베를린에서 대학을 다녔던 필자에게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다. 동베를린 주민들이 베를린장벽을 넘게 된 것이 11월 9일 밤늦은 시간이었다. 다음날 새벽에는 동쪽 주민들이 장벽의 주요 포스트마다 설치된 문을 열고 서베를린으로 넘어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를 뉴스를 통해 들은 기숙사 옆방의 독일인 친구가 이른 새벽 방문을 급하게 두드렸다. 급히 친구의 차를 타고 기숙사 가까운 부란덴부르크문으로 가니 이미 동베를린 주민 수만 명이 말 그대로 물밀 듯이 서베를린 지역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뉴스를 통해 현장에 나온 서쪽 주민들의 환호박수와 눈물의 포옹 장면들은 아직도 생생하다. 20세기 최고의 역사적 사건의 하나로 불리는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현장에서 목격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베를린장벽은 1961년 동독에 의해 설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베를린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점령지로 남게 되었다. 지리적인 위치로 보면 동독지역에 속하고 있으나 수도라는 이유로 4개국이 분할하여 베를린 서쪽은 미국, 영국, 프랑스가 그리고 동쪽 지역은 소련이 점령한 상태였다. 베를린장벽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동서베를린 주민들은 서로 경계 없이 자유롭게 베를린지역을 다닐 수 있었다. 동베를린 주민이 서베를린 직장에 다니는 경우도 흔했다고 한다. 그러나 장벽이 서베를린 지역 전체를 둘러싼 형태로 설치되면서 서베를린은 말 그대로 육지 속의 섬처럼 변해버렸다. 장벽 설치 전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을 통해 자유진영으로 넘어가는 동독주민들이 매일 8천 명 정도 되었다고 하니 동독정부 입장에서는 인구유출로 인한 문제가 심각했다고 한다.

필자가 서베를린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1980년대 중반에도 서베를린 주둔 연합국 군인들을 흔히 볼 수 있었으며 전쟁의 흔적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베를린이 동서로 나누어지면서 서베를린에서 전철을 타면 동베를린 지역의 지하 전철역들을 통과하고 다시 서베를린 지역으로 나오는 노선도 몇 개 있었다. 물론 동베를린 지역에 위치한 지하역사는 서베를린 전차가 정차하지 않고 그냥 통과만 하는 형태였다. 비록 땅 위는 동서로 나누어 있었으나 전철이 다니는 땅 아래만큼은 분단 전의 상태로 유지가 되었던 것이다. 서베를린 지역의 동베를린과 연계된 전철역사도 사용은 안 하였으나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이런 역사들은 1990년 10월 독일이 통일되면서 바로 연결하여 사용을 하게 된다. 냉전시기를 거치면서도 통일이 되면 전철이 연결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독일인의 선견지명을 느낄 수 있다.

베를린장벽붕괴 1년 후 독일은 통일이 되었고 32년이 흘렀다. 통일 후 약간의 사회경제적 진통을 극복하고 지금은 유럽을 대표하는 강국으로 발전하여 한편으로는 부러운 생각까지 든다. 통일 당시, 필자는 분단국가인 한국도 조만간 통일이 될 거란 희망 섞인 이야기를 독일 친구들한테 했던 기억이 난다. 독일은 통일을 하였으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남북 간의 긴장이 지배하고 있다. 지난 보름 동안 북한은 미사일 수십 발을 쏘고 일부는 남쪽을 향해 우리 군이 북쪽 수역에 대응 발사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언제까지 이렇게 서로가 총부리를 겨누고 살아야 하는지 가슴이 답답한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한반도가 분단된 지 77년이 되었다. 두 세대를 훨씬 뛰어넘는 세월이다. 동서냉전은 독일 통일과 함께 역사의 유물이 되었다. 남북 간의 대결도 이제 끝나야 한다. 왜냐면 우리는 함께 발전해야 할 운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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